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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멀리서
  • 잃어버린 이름에게
  • 김이설
  • 11,700원 (10%650)
  • 2020-10-26
  • : 421

나이 든다는 건 물리적인 시간이 쌓인 것이 아니라, 그만큼 낡아가는 몸과 마주하는 일이란 걸, 근주는 근래 들어 절실히 깨달았다. (「우환」, 25쪽)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난 듯 반가운 문장이었다. 반가웠지만 서글픔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살아가고 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한꺼번에 많은 생각들이 나를 덮쳤다. 늙고 있다는 말을 농담처럼 진심으로 하고 있지만 정작 나는 서러웠던가. 가장 먼저 온 노화는 눈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안과’에서는 노화라고 말했다. 아무 걱정 할 필요도 없다는 듯. 안과 검진을 가야 할 시기를 놓쳤다. 안내 문자를 받고 무시했다. 코로나를 핑계로. 하나 둘 늘어나는 흰머리를 신경 쓰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소설 속 인물에 이렇게 쉽게 동화된다는 건 좋은 걸까, 혼자 생각한다.


김이설의 연작소설집 『잃어버린 이름에게』는 네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전혀 모르는 이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공간은 ‘신경정신과’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마음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공간,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작정 털어놓고 싶은 간절함에 찾은 공간,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마지막이라 선택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으로 하루를 버티고 견디는 일상은 도처에 있다. 내가 아는 이도 그렇하고 누군가에게 나는 그곳을 추천하기도 했다.


소설 속 중년 여성의 삶이란 대체로 평온해 보인다. 그러니까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렇다. 돌봄이 필요 없는 아이들, 자리를 잡은 남편, 이제는 잊었던 스스로를 찾아도 좋을 시기처럼 보인다. 그때 몸이 신호를 보낸다. 「우환」의 주인공 ‘근주’는 건강검진에서 이상 소견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자궁경부암 ’추가 검사, 암에 대한 두려움을 시작으로 천천히 그녀의 일상과 마주한다. 자궁경부암으로 투병하고 세상을 떠난 엄마를 간병했던 시절. 결혼과 출산, 육아, 살림으로 이어진 현재의 삶. 그 과정을 지나온 친구와의 대화만이 작은 위안이다. 그리고 매일 삼키는 약. 「기만한 날들을 위해」속 ‘선혜’는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약을 먹는다.


우울증 약이라는 것이 그랬다. 잘 맞으면 일상이 평온해지고 가시 돋친 마음은 무뎌진다. 화날 일도, 노여울 일도, 짜증 날 일도 없었다. 분노나 수치심, 슬픔도 사라졌다. 부정적인 감정은 사그라들고 긍정적인 감정들만 살아남았다. 남편이 혈압약을 먹듯이 나는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감기약이나 비염약을 먹듯이 불편한 증상이 나타나면 약으로 다스리는 것과 같다고 여기면 편했다. (「기만한 날들을 위해」, 59쪽)


이른 나이에 결혼한 선혜는 23년 차 주부다. 군대에 간 아들, 대학생활을 위해 독립한 딸. 혼자만의 시간이 늘어난다. ‘빈 둥지 증후군’일까, 가족을 위해 정성을 다한 시간이 허무하다. 운전을 배우겠다는 자신을 타박하는 남편. 어쩌면 선혜가 정신과를 찾은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거기다 알게 된 남편의 추악한 행동. 이혼을 생각했지만 선혜는 이혼하지 않기로 한다. 남편과 싸우면서 살아가기로 한다. ‘기만한 날들을 위해’란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산다는 건 무엇일까. 누구에게 물어야 답을 들을 수 있을까. 무기력한 날들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미아」의 ‘소영’의 마음이 그러했다. 남편의 직장 때문에 이사 온 낯선 도시에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그곳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을 남편은 알지 못한다. 남편과의 시간은 더 많아졌지만 멀어진 것 같다. 사소한 것들에 울컥하며 감정을 자제하기 힘들다. 「미아」는 김이설의 이전 단편 「손」, 「빈집」과 겹쳐진다. 혼자라는 외로움과 고독, 소통을 원하는 간절한 마음.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오후 3,4시만 되면 마음이 가장 힘들어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안개가 짙게 가라앉고 그 안개 위에 발을 디디고 싶은 생각? 그렇게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시달릴 때가 많아요. (「미아」, 131쪽)


「경년」속 ‘나’에게 중년은 시련인 것만 같다. 고교입시를 위해 만난 학부모 모임에서 들은 아들의 이야기. 열다섯 아들이 여자아이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 놀라운 건 스트레스 해소라는 아들의 입장과 그런 아들을 두둔하는 남편. 이제 초경을 시작한 딸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복잡하다. 얼마나 더 놀라운 일들을 견디고 지나가야 할까.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 예고 없이 다가오는 몸의 변화는 더욱 힘들다.


세상의 모든 여자가 갱년기를 겪는 걸까. 그건 마땅히 겪고 참아내면 되는 시간일까. 폭풍우가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석류 음료나 마시면서, 호르몬제와 여성 비타민제를 찾아 먹고, 어떻게든 친구들을 만나 맛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 시기는 끝나는 걸까. (199쪽) (「경년」, 199쪽)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가 필요한 사람은 그런 사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소설 속에서 마주하는 그들처럼. 김이설 작가가 불러낸 네 명의 여자, 우리는 그들 중 하나로 살고 있을 것이다. 사춘기를 통과했듯 건너야 할 시기, 지나야만 알 수 있는 인생의 과정. 그래서 더욱 이 소설집이 애틋하다. 주변의 언니, 동생, 내가 아는 이들과 함께 읽고 싶다. 엄마, 아내로 살아내느라 잃어버린 이름을 가만히 부르며 ‘괜찮냐’고, ‘너는 어떠냐’고 물어봐 주는 이들. 서로가 서로를 챙기며 기댈 수 있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그녀들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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