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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멀리서

류은숙의 『여자들은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란 책을 읽기 전 표지의 그림을 한참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은 한 여자의 무릎 위에는 한 권이 책이 올려져 있다. 편한 자세로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무릎 위 책의 제목은 무엇일까.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그 그림 속 여자가 나라면 나는 무엇을 보고 싶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무슨 책을 읽고 싶을까 그런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세상에 대한 것이었고, 결국 책 속 여자들의 세상과 다르지 않았다.


여자와 장소를 동시에 생각하니 특정한 장소가 몇 개 떠올랐다. 책에서도 언급한 부엌(주방)과 화장실이 가장 먼저였다. 나 역시도 최대한 공동화장실 사용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경험하지 않아도 두려움과 공포를 안겨주는 공간이다. 여성에게 불합리한 장소, 차별적인 장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묵과해온 나의 상처를 대면하는 순간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하고 좋은 책이다. 내가 경험한 장소와 공간의 의미와 관행에 대해서도 의문과 의심을 갖게 만들었으니까.


부엌은 항상 여자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가족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 일에 대해 보살핌과 희생정신까지 고스란히 그곳에 담겨 있었다. 과거와 다르게 편리해졌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여성들의 공간으로 여긴다. 식기세척기, 전기밥솥, 전자레인지는 여성만을 위한 제품이 아니다. 세탁기와 청소기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집안의 주방과 곳곳을 노동의 현장, 노동을 요구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일하는 남자와 똑같이 일하는 여자에게도 집은 노동의 연장선이 아니라 휴식과 쉼, 즐거움의 장소여야 마땅하다. 부엌에서는 더더욱.


동일한 공간을 무대로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아주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 장소는 경험이 일어나고 무르익는 곳인데, 성별·나이·계층 등에 따라 특정 공간에서 맺는 관계와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 『여자들은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 11쪽)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면 교육으로 실천해야 한다. 부엌뿐만 아니라 이 책에 등장하는 13개의 장소에 모두 그렇다. 우리는 알지 못해서 실수를 범하기도 하지만 알면서도 잘못을 행한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장소와 열린 공간이 상처로 연결되면 안 된다. 학창 시절 운동장은 여학생들에게 닫힌 장소였다. 저자의 경험처럼 2차 성징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해 체육 활동을 제한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일도 다르지 않다.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 시간에 축구나 농구를 하는 학생들은 남학생이었다. 교실과 장례식이라는 장소에서도 여성은 주체가 아닌 도움을 주는 존재였다.


회장이나 반장은 남학생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그게 당연시되었다. 장례식장에서 상주는 남자라는 사실도 그렇다. 한 번도 고민을 해본 적이 없는 문제라서 나 역시 놀랐다. 딸이 아니라 사위가 상주이고 어린 남자아이가 상주 역할을 하다니. 돌이켜보니 큰언니의 장례식에서도 그랬다. 결혼을 하지 않은 큰언니의 상주는 조카였다. 물론 현재는 다르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그것을 고치기까지 저자와 같은 여성 인권활동가의 수많은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행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는 점도 충분히 공감한다. 남성의 경우, 무박여행, 자유여행에 대해 아무런 제약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 반면 여성은 불편한 시선을 동반한다. 여행지의 숙소에서 벌어지는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한 대책과 제도 개선이 아니라 혼자 여행을 온 여성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 친절과 배려에도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게 여성의 현실이다.


여성들의 장소 투쟁은 지금 이 시대에 산소호흡기 같은 것이다. 그런 곳으로 정치적 여행을 확장하고 싶은 것이 내 꿈이기도 하다. 불안을 동반자 삼아야 하고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유독 가시화되는 여행이더라도 장소와 장소를 연결하고 책임지는 마음이라면, 여행의 세계를 바꿀 힘이 여성의 여행에 있을 거라고 믿는다. ( 『여자들은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 111쪽)


이전에는 머물고 생활하는 장소를 사유한 적이 없었기에 여성과 장소를 연결하니 더욱 집중하게 된다. 하나의 장소에 대해 그곳의 의미와 함께 우리가 살아갈 장소에 대해서 고민하고 충분히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려준다. 청소년과 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떠나서 우리의 주변에서 익숙하게 자행되는 차별적인 행동과 불합리한 제도에 대해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자리와 나의 공간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 이 공간에 대한 감사함도. 어린 시절 오빠에게는 방이 있었다. 성이 달라서 주어진 공간이 아니었다. 아들이라서, 장손이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두 권의 책이 생각났다. 제목 그대로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하재영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과 김이설의 소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이다. 하재영의 에세이는 작가가 지나온 공간, 그러니까 어린 시절 가족이 모두 함께 살았던 집, 독립을 하면서 살게 된, 방들, 그리고 원하는 공간으로 이뤄진 집까지. 다양한 공간이 등장한다. 보통의 에세이였지만 공간에 대한 사유는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안겨주었다.


공간을 소유하는 것은 자리를 점유하는 일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만큼이나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하는 물음이 나에게 중요했다. 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집에서의 내 자리’를 인식하는 일이었다. 사회도 물리적으로는 하나이 거대한 장소이므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나의 위치도 자리의 문제였다. 이것은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넓게는 이 세상에서, 좁게는 이 집에서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130쪽)


내가 자기만의 방을 소망할 때 나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나 자 자신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나의 고유함으로 자신과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135쪽)


하나의 공간에 특정되는 인물, 엄마에 대한 부분은 속상한 마음이 컸다. 엄마에 대한 공간, 엄마의 자리에 대해서. 나만의 공간에서 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엄마에겐 어떤 공간이 필요했고 가장 절실했을까. 공간이 무엇으로 채워졌느냐를 통해 우리는 그곳의 주인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편안한 공간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는 엄마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북성로 집에 살던 어느 날, 내가 거실과 주방에 없는 엄마를 찾으러 다니며 엄마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고 느꼈던 기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나는 엄마의 자리, 엄마의 일이 다른 어딘가, 다른 무언가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142쪽)


엄마의 역할, 엄마의 자리를 생각은 엄마의 노동으로 이어진다. 가치를 평가받지 못했던 노동,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던 일, 그 고단함을 헤아려준 이가 없었다. 김이설의 소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에서 화자가 하는 일이다. 그녀는 밖에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든 집안 일과 양육을 도맡았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일은 어려웠다. 그럴수록 자신의 공간, 자신의 자리가 간절했다. 그녀가 삶의 전반을 살아온 목련빌라를 나와 작은방을 얻었을 때 어떤 안도감을 느꼈다면 그건 당신도 그런 시절을 견뎌왔기 때문이리라. 우리에게 온전히 나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 적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만이라도 나는 나로 살고 싶었다. 필사 노트는 계속 늘어났다. 혼자 지내게 되었다고 곧바로 시가 써질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동안 온전히 나에게 몰입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래서 시가 쓰고 싶었다.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170~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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