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하는 인간
카뮈는 이 책을 출간한 뒤 오랜 친우였던 사르트르와 결별했다. 카뮈와 사르트르는 공산주의, 특히 소련에 대한 입장이 달랐는데 이 당시 소련의 집단 포로수용소 소문의 실체가 드러남에 따라 마침내 두 인물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다. 카뮈는 그 어떤 폭력이라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사르트르는 폭력을 인정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때 폭력이란 ‘진보적 폭력’을 말하며, 카뮈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혁명-마르크스주의를 비난한다. (‘진보적 폭력’ 개념을 처음 등장시킨 이는 메를로 퐁티로 그는 진보적 폭력을 옹호했지만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진보적 폭력을 외면하였다.)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에겐 마르크스주의가 유행이었다. 마르크스가 짱이고 신이고 이러쿵 저러쿵. 마르크스주의만이 나치즘에 대항할 수 있으며 그날의 도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뮈는 이러한 희망 섞인 믿음을 비판한다. “그들은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망각하고, 연기처럼 허망한 권력을 위하여 희생자가 된 존재들을 망각하고, 그 무슨 찬란한 도시를 위하여 변두리의 비참을 망각하고, 헛된 약속의 땅을 위하여 일상의 정의를 망각한다. 그들은 개인들의 자유에 절망하고 인류의 기이한 자유를 꿈꾼다. 그들은 고독한 죽음을 거부하고 놀라운 집단적 임종의 고통을 영생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것을, 세계를, 살아 있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유럽의 비밀은 더 이상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혁명은 언제나 실패로 귀결된다. 설령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혁명의 주역들은 다시금 탄압자들로 변신하며 그들은 또 다른 이들에 의해 몰락하게 된다. 이들이 매번 실패하는 이유에 대해 카뮈는 그들이 항상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카뮈가 말하는 불가능한 것은 바로 절대적 정의를 말한다. 그러나 혁명가들이 바라는 정의는 실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완벽하지도 않고 모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라는 절대적 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곳은 유토피아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토피아는 그들이 죽인 신과 다를 바 없다. 결국 본래 있던 신을 죽이고 새로운 신을 만들어낸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카뮈는 약간의 관용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결코 완전무결할 수 없으며 이런 인간들로 이루어진 사회 또한 그들이 바라는 절대적 정의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점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반항하는 인간은 일반적인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인정되기를 바란다. 이 한계야말로 바로 그 존재가 가진 반항의 힘이기 때문이다. (...) 반항하는 인간은 아마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자유를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는 한 그는 존재를 파괴하고 타인의 자유를 파괴할 권리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카뮈의 반항은 한계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다른 이들의 자유를 침범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자유를 침범당하지 않도록 한다. 이를 주인과 노예 간의 관계를 예로 들며 설명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주인과 노예가 있는데 어느 순간 노예의 마음 속에서 반역의 충동이 생기는데 이때 자신의 가치, 권력을 의식하게 된다. 노예는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게 되는데 이때 거부하는 행위는 개인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집단을 위해서이며, 또 노예가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피해자들 간의 연대성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여하튼 노예의 반항, 즉 개인의 반항은 곧 집단의 반항으로 확대할 수 있는데 문제는 여기서 왜곡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연대성이 곧 전체화된다는 것이다. 본래 반항 정신은 대지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세계 안에 속해있기 때문에 한계를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인데, 문제는 혁명가들이 등장하면서부터 신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에 대한 자유를 갈망하면서부터 달라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사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카뮈는 그가 “극단적인 귀결로의 비약”을 하여 자유를 위해 “세계 질서에 대한 반항과 자기 자신에 대한 반항”을 하였는데 문제는 신을 부정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신이 살인하고도 그것을 부정한다면 인간이 인간을 살해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모순을 지적한다. (솔직히 모르겠음) 그러나 사드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사형에 대한 모순을 지적하며 스스로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를 죽이는 것에 대한 증오를 보인다. (여기서 다시 카뮈가 지적하는 모순이 드러나는데 하나의 살인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 모든 살인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또 다른 형이상학적 반항은 허무주의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니체로부터 시작된다. 참고로 카뮈는 니체의 해석을 따라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한가지 니체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 있다. 니체가 주장한 것들이 이후의 폭력을 정당화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 니체의 허무주의적 반항이 모든 것을 허용하게 만들어 진정한 반항의 의미가 왜곡됐다고 말한다. 이 왜곡된 반항은 이후 전체주의, 민족주의 등으로 나타나 전쟁(세계대전)에 이용된다.
하여간에 카뮈가 『반항하는 인간』에서 중점적으로 물어보는 건 이거다. 폭력(살인)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대답은 아니오다. 카뮈는 양심적인 살인자들에 대해 서술하며 그들의 행동-자신들의 행동, 즉 폭력(살인)에 대한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이 가장 양심적이라고 말한다. 어떠한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 카뮈에게는 차라리 살인을 한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행동이 나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완전히 옹호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필요한 폭력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폭력을 인정하는 순간 그 정당성은 또 다른 폭력을 무차별적으로 허용하게 된다. “반항하는 인간이 살인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살인 행위와 스스로를 화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죽음과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가들의 반항은 왜곡된 반항이다. 그들이 말하는 ‘진보적 폭력’이란 자신들의 모순을 애써 정당화시키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왜곡된 반항을 이용하여 전체주의를 부르짖은 나치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카뮈는 개인을 억압하고 희생하게 만드는 전체성을 부정하며 항상 개개인의 권리-자유를 인정하자고 말한다. 실체 없는 무언가를 갈망하고 목표로 삼는 것 대신 현재에 충실하자고 주장한다.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항상 삶을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반항하며 살아가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