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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말해두고 싶은데, 나는 야구를 좋아한다." 125쪽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을 읽으면 하루키 처돌이는 어? 아니지? 이러기 시작하는데요. 이게 에세이야, 소설이야 싶을 때에 우리는 알게 됩니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은 하루키의 자전적인 소설인 거 같아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주인공이네요. 6년 전에 낸 소설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고 저는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했거든요. 하루키는 하루키답게 할 일이 있다고요. 근데 이번 소설 난리나요. 하루키가 하루키를 잘하면 이렇게 되네요.  


  안 그래도 저 요즘에 "모두가 디히텐(쓰기)"이라는 말 엄청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경계를 그냥 뛰어넘어버리네요. 그래 에세이도 없고 소설도 없지. 모두가 글쓰기지. 이론상으론 알겠는데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했을 때, 차마 잡을 생각도 못했던 싸인볼처럼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이 제 무릎 위로 툭, 하고 떨어졌고요. 하루키 에세이 좋아하시는 분들은 꼭 읽으시고요. 개좋네요. 아직 다 못 읽었는데 너무 좋아서, 여기 말하고 가서 마저 읽을게요.


  에세이에서 오조오억번 얘기했던 야구장이랑 신인문학상 탄 얘기가 이렇게 소설이 되네요. 이 소설 읽고 뭘 생각했냐면, 생각해보니까 하루키는 "좋아한다"로 글을 쓰는 사람이구나. 여기서도 그래요. 야구, 자이언츠 말고 산케이 아톰스, 라거 말고 흑맥주, 슈만의 사육제, 김릿이 아니라 보드카 김릿, 폴 스미스의 다크블루 슈트 등등. 그런 사람은 평생을 좀 가볍다는 소리를 듣고 사는구나. 어느 한 부분이 끝내 나이 들지 않은 채로, 서른일곱 살을 한 마흔번쯤 사는 기분으로 살아도 괜찮구나, 그래도 어떤 부분은 분명히 깊어지는구나 생각했어요.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도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저번 소설집부터 카프카 오마주가 한 편씩 들어가 있어요. 이번에는 <학술원에의 보고> 다시쓰기고요. 카프카가 보면 좀 억울할 걸? 꼭 오래 살아야지. 그래서 글쓰기 스타일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카프카 뒤집어보고 이어써보고 그래야지. 이 소설은 카프카와 하루키가 아주 오랜 텀을 두고 주고 받는 대화 같고요. 거기서 원숭이가 사람이 됐잖아요. 근데 그래도 진짜 사람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이 다른 원숭이랑 짝을 지어야 되는데, 암컷 원숭이 보고 "미혹"의 눈빛이라고 막 경멸하고 그러잖아요. 사람의 말을 배웠는데 여전히 내 몸은 원숭이일 때, 그 대안을 하루키가 이어서 씁니다. 염력 이런 것도 막 갖다 써요.



  "그리고 그 여자의 이름이 적힌 물건과 염력을 써서 상대의 이름을 훔친다."

  "그렇지요. 그것에 적힌 이름을 오랫동안 응시하면서, 정신을 오로지 한 점에 집중하고,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의식 속으로 고스란히 거둬들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정신적 육체적 소모도 크지만, 일심불란하게 어떻게든 해냅니다. 그렇게 그녀의 일부는 저의 일부가 됩니다. 그리하여 저의 갈 곳 없는 연정은 나름대로 무사히 충족되는 셈이지요." 201쪽

  

  궁극의 연애와 궁극의 고독 - 나는 그뒤로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들을 때마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인생'에 대해 생각에 잠기곤 한다. 작은 온천 마을의 허름한 료칸 다락방에서, 얇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든 늙은 원숭이의 모습을 생각한다. 나란히 벽에 기대어 맥주를 마시면서 그와 함께 먹었던 감씨과자와 진미채를 생각한다. 214쪽



  12월이 됐고요. 저는 "11월이었다."로 시작하는 글을 쓰려다 못 쓰고 하루키에 대한 팬심만 남기고 갑니다. 요며칠 추워지니까 잠이 늘고 기운이 없더라고요. 이럴 때 보면 사람도 동물 맞는 거 같아요. 그러니 건강 잘 챙기시고요. 환기 좀 시키려고 창문을 다 열어놓고 이불 속에 숨어서 조금만 읽어야지, 하고 읽다가 너무 신났네요. 뭐야 유난 떨어서 읽어봤더니 별로잖아 하실 분도 있으실 테니까 "먼저 말해두고 싶은데,"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합니다.  


 *


  간소한 제본, 일련번호를 기입한 오백 부에 일일이 사인펜으로 또박또박 서명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하지만 예상대로 거의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런 것을 돈 내고 산다면 어지간히 별난 인간이다. 실제로 팔린 것은 삼백 부쯤 될까. 나머지는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기념품 삼아 나누어주었다. 그것이 지금은 희귀한 컬렉터스 아이템이 되어, 놀랄 만큼 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세상일 알 수 없다. 내 수중에는 두 부밖에 남아 있지 않다. 더 많이 남겨뒀으면 부자가 됐을 텐데. 135쪽,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십 년 동안, 나는 실로 방대한, 거의 첫문학적 횟수의 ‘지는 경기‘를 지켜봐왔다. 그렇다, 인생은 이기는 때보다 지는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떻게 상대를 이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잘 지는가‘ 하는 데서 나온다. 131쪽
어차피 나처럼 작은 어린애가 사인볼을 잡아낼 리 없다. 그러나 다음 순간, 문득 내려다보니 무릎 위에 볼이 놓여 있지 않은가. 우연히 내 무릎 위로 와서 떨어진 것이다. 마치 하늘의 계시라도 되듯이 툭, 하고.

"야, 잘됐다."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반쯤 어이없는 듯, 반쯤 감탄한 듯. 그러고 보니 내가 서른 살에 소설가로 데뷔했을 때도 아버지는 거의 똑같은 말을 했다. 반쯤 어이없는 듯, 반쯤 감탄한 듯. 137쪽
나도 소설을 쓰면서 그 소년과 똑같은 기분을 맛볼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사과하고 싶어진다. "죄송합니다. 저기, 이거 흑맥주인데요"라고.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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