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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 [전자책] 팬텀 이미지
  • 정지돈
  • 6,000원 (300)
  • 2020-03-11
  • : 47
-20210207 정지돈 글. 최지수 그림.

아침에 정지돈에서 오한기로, 다시 오후에는 정지돈으로 돌아왔다. 처음 읽는 작가에다 여러 번 읽어도 읽기 힘들다는 소리에 겁을 조금 먹었다. 초반부터 몇 쪽 넘기다 말고 어? 하고 앞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농담처럼 붙은 조금은 상스러운 후장 사실주의래...하는 말이 떠올라서 그래 뭘 심각해, 그냥 힘 빼고 살살 슬슬 읽자, 하고 읽었다. 그랬더니 그냥저냥 재미있게 읽혔다.
경주에 여러 번 가 봤다. 초4 때 걸스카우트, 초6 때 수학여행(밤에 안 자고 깝치고 돌아다니다 선생님이다! 하는 소리에 마구 뛰어 도망가다 모퉁이에서 다른 아이와 부딪혔고, 눈가가 찢어진 흉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중2 때 또 수학여행(전교 1등은 에쵸티를 깐 대역죄인에다 이런저런 미움을 샀는지 친구가 하나도 없었고, 전교 꼴등에 친구가 하나도 없는 또다른 아이와 함께 다녔다. 말이 하나도 통하지 않아 그냥 같이 다니기만 했다), 24살에 남자친구와 여행(이때 남산에 처음 올라가 봤다)…그래도 아직까지 경주를 잘 모르겠다. ‘경주’라는 영화를 나중에 봤는데, 영화 속 고분이 여전히 낯설었다. 소설 속 호텔이 있는 보문관광단지도 버스 타다가 지나친 거 같은데 다른 도시의 다른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화자가 헷갈리고 한 사람의 인생이 소설 뒤 작가 연보처럼 막 덩어리로 몇 명 던져졌는데, 그게 연보처럼 정리된 건 아니고 대화 속에서 구전되는 식인데, 적응 되니까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싶었다.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대개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고, 소설도 사람에 관한 이야기니 저렇게 쓸 수도 있지 뭐.

+밑줄 긋기
-어머니는 그가 열두 살 때 오렌지카운티 교외의 바에서 실종됐고 두 달 뒤 시체로 발견됐어. 경찰은 바텐더, 손님, 직장 동료, 잠시 만났던 남자, 이웃들 모두 조사했지만 술에 절은 몇몇 용의자의 살인과 관계없는 사소한 범죄만 감지했을 뿐 끝내 범인을 찾지 못했어. 매일 전국의 술집에서 여자들이 구타당하고 실종되는 일이 일어나던 때였어. 미국은 종전 이후 황금기를 맞이했고 매카시즘 광풍에 휩싸였으며 꽃의 시대가 찾아왔지. 그러니 교외의 어두컴텀한 바 뒤에서 무슨 일이 있건, 여자들이 비명을 지르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어. 그건 그 여자들의 문제 아니야? 수영장 청소부는 그렇게 생각했고 1965년, 약에 절어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모로에게 가끔 편지가 왔는데 비와 강물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으로 그게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주제라고, 엄청난 양의 폭풍과 비로 불어난 강물이 북아메리카의 앵글로색슨을 모두 태평양으로 휩쓸어 버릴 거야, 그게 바로 앵포르멜이야. 1975년 한 편지에서 모로는 말했고 수영장 청소부는 재활원에서 편지를 읽으며 미치길 원했던 친구가 미쳐 가는 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어. 다나카는 김신에게 편지를 읽듯 말했고 이것은 자신이 미국의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은 남자의 일생을 소설을 쓸 요량으로 극화한 것인데 이미 너에게 말해 버렸으니 나는 소설을 쓸 수 없다,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했다. 왜 쓸 수 없냐고 김신이 묻자 다나카는 소설은 일종의 마법과 같아서 발설하면 기운이 빠진다, 내면의 두께가 소진되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소설은 일종의 점조직이야, 동료 조직원의 주소도 직업도 알 수 없고 오직 그가 전달해 준 정보만 다시 전달할 뿐, 조직원의 상태나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 허점이 드러나 조직 전체가 무너지는 거야. 다나카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지만 김신은 다나카가 즉흥적으로 떠오른 이야기를 영업 비밀이라도 되는 양 심각하게 말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럼 다른 걸 쓰면 되겠네. 수영장 청소부의 이야기도 좋지만 좀 더 대중적인 걸 쓰는 게 어때? ...다나카는 내 소설은 번역될 리 없어, 출간될 리도 없는데 번역이 되겠니, 그는 난간에서 훌쩍 뛰어 수영장 바닥으로 내려갔다. 바닥엔 젖은 낙엽들이 가득했고 다나카는 낙엽들을 짓이기거나 발로 차며 걸었다. 출간되지도 않을 소설을 왜 쓰는 거야. 김신이 물었고 다나카는 그 말 당장 취소하라며 그건 소설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다. 소설가라면 모름지기 출간되지 않을 거라는 각오로, 거절당할 거라는 각오를 글을 써야 해, 더 좋은 건 원고를 보내지 않는 것이지. 김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보내지도 않을 소설을 왜 쓰지?

-김신은 딱 한번 지하철을 타봤다. 이제 서울에 가면 매일 타는 거? 동대문에서 시청으로, 시청에서 종로 5가로. 그렇지만 조금 무섭다. 땅이 무너지면 어떡해? 김신은 불안에 떨었고 다나카는 땅 위로 다녀도 땅이 무너지면 다쳐, 아…...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이젠 땅 위로 다닐 때도 불안하겠네. 그래, 그러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어. 다나카가 말했다. 불안은 현상이 아니라 심리야, 그러니 더 이상 아무것도 불안해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불안하지 않을 거야. 다나카는 중얼거렸다.

-콜라를 마시는 미셸 푸코 같아요. 아서 존슨의 사진을 본 상우가 말했다. 상우는 경주에 가고 싶었지만 경주 맛집을 검색한 뒤 싫어졌다고 했다. 한기는 경주까지 뒤로 걸어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왜요? 길티 플레져예요. 한기가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묻자 한기는 제 길티 플레져는 뒤로 걷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무슨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명을 요구하자 한기는 죄송합니다, 제가 이상한 거 같아요. 은진이도 저보고 아무 말이나 하지 말래요, 라고 말했다. 은진은 한기의 아내다. 나는 한기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에 가끔 놀란다. (ㅋㅋㅋㅋㅋㅋ이 부분부터 상우와 한기가 등장하더니 여행 끝까지 내내 같이 가는데 그게 왜때문에 깨알 같이 웃기다…)

-나는 일이 겹치는 걸 좋아하고 일을 생각하고 바라보면 어느 순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서히 일의 중력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게 보인다. 그러니 어디로든 가야 한다. 무엇이든 읽어야 하고 어떤 이야기라도 해야 한다.

-우리는 아주 잠깐 신라 시대의 사람들에 대해서, 과거에 대해서 얘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흔적을 이해할 수 없고 기억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건 모두 존재하지 않았거나 지금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존재했었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게 무슨 말이죠?

-Q.정지돈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A.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ㅋㅋㅋㅋㅋ오 수키...그게 여기서 왜 나와….그런데 왜 맞는 말 같냐…)
Q.<소설>은 어떤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A.가끔 개인의 인생을 바꾸고 사회 제도를 바꾸기도 하지만 대부분 아무런 힘도 없는 거 같다.(너무 솔직한데 공감해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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