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레슬리 뉴비긴/홍병룡 옮김, IVP)
-다북다복 14th.
굉장히 어려운 책이었다. 글쓴이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쉽지 않았다. 글쓴이가 하고 싶은 말은 뒤에 있으니, 뒷부분까지 읽은 후에 독서모임에 참여했어야 했는데, 책도 겨우 읽었다. 다시 읽을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번역에서 아쉬운 부분이 조금 있었고(이중적 표현 등), 목차만 봐서는 글쓴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다원주의로 설명할 수 있는 모든 분야를 총망라해서 설명하고 있는 백과사전격 책이다.
내 언어로 바꾸는 일이 어려워서, 책의 언어로 대략의 내용을 요약한다.
먼저 글쓴이의 입장은 이렇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생각해볼 만하다.
🏷진리라는 것은 어느 한 종교 전통이나 문화 전통에 국한될 수 없는, 더 크고 더 풍성하고 더 복잡한 것이라고 우리 모두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가 진리를 찾는 겸손한 구도자의 자세를 품고, 열린 마음을 견지하며, 인류의 다양한 종교 체험에서 나온느 것을 모두 귀담아 듣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은가? 일방적인 복음 전도는 그만두고 오히려 대화의 자리에 나아가서, 서로의 종교적 체험을 나누고, 상대의 종교를 바꾸려 하지 말고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 더 겸손하고 정직한 태도가 아닐까? 오직 열린 마음이 있을 때만 진리에 도달할 희망이 있다.(24~25쪽)
글쓴이가 이런 주장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기독교를 진리의 유일한 소유자로 주장하‘(292쪽)면, 🏷‘우리의 절대가 지배와 억압을 낳는 또다른 근원이 되고 말 것이‘(303쪽)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다. 인본주의적 관점인 것 같긴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이 모든 인간의 삶에 작동한다고 믿는 의미에서 다원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유일하고 결정적 계시임을 부인하는 그런 다원주의는 거부한다.‘(338쪽)
글쓴이가 말하는 🏷‘종교적 다원주의란 종교 간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진리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있다고 믿는 신념이다.(39~40쪽) 종교-정확하게는 기독교가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가치의 영역이 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인본주의가 시작되면서, 기독교 신앙이 ‘이성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가 계속되어왔다([순전한 기독교]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싶다.). 현대로 올수록, 절대적 진리는 없다는 사고가 팽배해졌다. 기독교는, ‘사실‘의 세계에서 ‘가치‘의 세계로 넘어왔다. 그러나 🏷‘정작 사실이라 불리는 것은 모두 해석된 사실이다. 우리가 무엇을 보는가는 우리의 정신이 어떻게 훈련받았는가에 달려 있다.‘(51쪽)
믿는 것이 곧 아는 것과 동의어인 때가 있었다. 그러나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분리된 계기가 되는 사건이 생겼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망원경(그리고 아마도 현미경)의 발명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새로운 발명품들을 통해 사람들은 사물의 실상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64쪽) 글쓴이는 이런 움직임의 선구자로 알려진 데카르트의 회의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더 나아가서 버트란트 러셀이 진술한 과학적 진리의 확립 방식을 여러 가지 논거로 비판하고, 극복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데카르트의 회의론에는 신앙의 행위가 들어갈 수밖에 없고(🏷‘어떤 신념에 대해 의심을 품으려면 그와 동시에 다른 신념을 확고히 붙들고 있어야 한다.(92쪽)), 생각은 ‘언어‘로 하는데 언어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버트란트 러셀은 가설 설정과 실험에서 자행되는, 믿음에 기반할 수밖에 없는 직관과 상상력을 설명하면서, 🏷‘이해에 도달하는 두 갈래의 길이 있어서 하나는 ‘지식‘이라 불리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라는‘(73쪽) 것을 주장하고 있다. 🏷‘믿음이 없는 앎은 없으며, 믿음이 앎에 이르는 길이다.(73쪽) 더욱이, 이 앎은 전통에 기인한다. 🏷‘우리는 교사의 권위에 기대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우리 스스로 그 가르치는 내용이 참이라는 것을 알기 위함이다.‘(95쪽) 🏷여러 개념들, 자료의 분류, 과학의 도구 역할을 하는 이론적 모델 등이 다함께 하나의 전통을 이루는데, 과학자들이 작업을 하려면 그런 전통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99쪽) 과학 역시 절대적 사실(진리)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게 엎어질 가능성이 없는 ‘사실‘들도 있다고 설명하시는 과학자를 본 적도 있는데, 동의하는 부분도 있지만 과학도 일종의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면에서. 글쓴이의 말마따나 과학적 사실과 관련해서는 왜 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을까.(401쪽)
그러면 🏷‘어떻게 해서 우리 문화에서는 누구나 수용해야 할 공적 진리, 곧 이른바 사실적 지식이라는 것과, 누구나 자유로이 선택해도 좋은 신념과 가치의 세계 사이에 이분법이 생기게 되었을까?‘(78쪽) 글쓴이는 그것을, 과학자들이 믿고 있는, 🏷‘목적 없는 우주의 개념이야말로 우리 세계를 둘로 분열시키는 것을 정당화시켜 준 장본인이다.‘(82쪽)라고 설명한다.
앞서 설명했듯, 🏷‘모든 추론 작업은 하나의 전통에 의존해 있‘(111쪽)다. 추론할 때 언어를 꼭 사용해야 하는데, 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의 전통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달리 추론의 능력을 계발할 길은 없다.‘(111쪽) 또한, 🏷‘모든 합리성이 사회적 전통 안에 몸담고 있는데, 이 전통이란 것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을 파악하는 데 얼마나 적합한지 늘 시험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진리란 오직 어떤 전통의 테두리 내에서 파악되는 것이며, 전통은 그 추종자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면에서 얼마나 적합한지에 따라 그 적합성을 판정받게 된다.(114쪽) 따라서, 🏷‘서로 상반된 주장들 사이에 공정한 심판자 노릇을 할 만한, 실체 없는 ‘이성‘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117쪽)는다.
글쓴이는 과학과 종교, 또는 기독교 신학의 유사점에 대해 계속 비교하며 설명하는데, 과학적 전통이 이성, 종교적 전통이 계시에 달려 있다는 주장은 의미가 없으며, 둘 모두 합리성에 기반하고 있다. 둘의 차이는 경험을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인데, 과학은 ‘나는 발견했다‘, 그리고 종교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다르다.(121쪽) 이 부분을 읽으며 [파인애플 스토리]의 리뷰가 생각났다. [파인애플 스토리]는 어떤 선교사 가정이 선교하러 가서 원주민을 고용해 파인애플 나무를 심었는데, 원주민들이 계속 파인애플을 훔쳐가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선교사는 파인애플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원주민은 자신이 심었으니 자기 것이라 생각했던 거였다. 선교사는 처음에는 화를 냈지만, 하나님 앞에 파인애플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리뷰에서는, 원주민은 이미 자연의 섭리대로 행동하고 있었으니 하나님을 자연으로 바꾸어 말해도 똑같은 논리가 아니냐는 거였다.
👉리뷰 주소: https://blog.aladin.co.kr/rahula/491458
아무튼 결론은,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현대를 지배하는 타당성 구조의 진리이고, 이는 하나님이 역사적 사건들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계시하시고 그것을 이루어 오셨다는 기독교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다.‘(129쪽) 그러므로, 이성과 계시를 반대 개념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성경이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이 현실을 이해하고 그에 대처하도록 돕는 합리적 담론의 전통은 반드시 (모든 전통이 그렇듯이)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146쪽) 이 부분은 아마도, 관찰, 해석, 적용 중 해석에 해당할 것 같다. 그 해석에 따라 삶이 달라지니. 기독교인이 삶을 살아가는 게 어려운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전통으로도, 공교육을 주도하고 있는 전통으로도 해석할 책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150쪽)
그러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글쓴이가 제시하는 방법은 이렇다. 🏷‘‘이성‘을 ‘성경‘과 ‘전통‘과 나란히 놓거나, 그것들을 보완하는 권위로 들먹인다는 것은 예수가 현재의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에 끼워 맞춰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선교사의 과업, 아니 어떤 상황에서든 교회가 할 일은 역사의 참 의미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에 비추어 기존의 타당성 구조에 도전하는 것이다.‘(187쪽) 성경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타당성 구조는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191쪽) 그리고 그 이야기의 의미는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196쪽) 이것은 공동체 단위(회중 중심의 교회)로 이루어지며, 🏷‘자기를 탄생시킨 그 이야기, 곧 예수의 사역, 삶, 죽음,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비우신 이야기를 정규적으로 재연하며 이 이야기에 따라 사는 공동체다.‘(230쪽) 🏷‘복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실마리, 곧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께 돌아가도록 반복해서 요구하고 있는데, 그 목적은 역사의 의미가 역사 자체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역사가 스스로 발전하다가 끝에 이르면 그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 또 행하시기로 약속하신 일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진정한 지평은 우리의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는 데 있지 않고 그분이 다시 오시는 데에 있다.‘(239쪽)
이런 이해는 선교와 전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개인 구원에만 초점을 두지 않아야 하는데, ˝저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와 같은 질문은 🏷‘개인의 궁극적 행복을 확보하고 싶어하는 개인의 욕구에서 시작하지,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서 시작하지 않‘(332쪽)기 때문이다. 🏷‘선교의 목표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한다면, 다른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들과 얼마든지 협력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에큐메니컬적인데, 나는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세상을 위한 교회, 세이비어 이야기]가 생각나는 책이었다.
📍타당성 구조
🏷각 사회에는 피터 버거가 말한 이른바 ‘타당성 구조‘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어떤 신념이 타당성이 있고 또 어떤 신념이 없는지를 결정해 주는 가정과 행습의 구조를 말한다. 우리는 다른 시대나 장소에서 이 타당성 구조가 작동하는 것은 쉽게 알아볼 수 있으나, 본인이 속한 문화에서 그것을 분별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110~1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