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병
나는 심각하게 바쁘고 중요한 때일수록 자꾸 딴 짓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고질병이 있다. 머리로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라고 계속 외치고 있음에도 내 몸은 머리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엉뚱한 짓에 몰두해 있곤 한다. 지금 이 순간이 그렇고, 오늘 아침에 그랬고, 어제도 그랬다. 고질병이라 표현했듯이, 당연히, 이번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껏 살면서 수없이 많이 그래왔다. 변명을 하자면, 바쁜 때에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딴 짓을 하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얼마 남지 않은 남은 시간에 몰려서 더욱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하여 더 멋지게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억지로 우겨본다. 물론 엉뚱한 짓을 할 시간에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한다면 조금 더 여유있게 더 잘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딴 짓처럼 보이고, 엉뚱한 짓처럼 느껴지는 일을 하고 있는 그 시간이 내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복잡한 머리를 환기 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고, 그 엉뚱한 일을 통해 뭔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거나, 막혀있던 어떤 흐름을 뚫어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딴 짓 하느라 보낸 시간만큼 더 긴박한 상황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더 긴장하고 더 집중해서 일을 할 수 있다. 대개 이 집중력에 의존하느라 바쁘고 심각하게 중요한 때일수록 자꾸 딴 짓을 하게 된다.
불치병
정말 수십번 반복해서 여기 이 서재에 이야기 하는 것 중 하나는 사람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심각한 병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 말도 여러 번 반복했는데, 과거 개그맨 전유성 씨가 길에서 본인의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는 말을 듣고, 나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사실 아주 오래전에 이미 어머니를 길에서 못 알아보고 지나쳤고, 여동생은 버스 안에서 마주쳤으나 못 알아보고 웬 낯익은 여성이 있네 라고 생각했었다. 가족들을 못 알아볼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말해 뭐 할까.
최근 어느 모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 한 여성이 유독 낯이 익다고 느꼈다. 이건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분명 나와 제법 인연을 맺고 있는 분일텐데, 내가 지금 기억을 전혀 못 하고 있다는 것. 그때부터 내 머리는 저 분이 누구인지 기억해내기 위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모임 진행자가 말하는 내용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누굴까?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이름. 분명 과거 어느 기억 속에서 본 얼굴이 었을텐데, 그게 어떤 장면인지를 떠올리면 단서가 될 수 있을텐데.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올릴 수 없었다.
한참 후에 서로 의견을 주고 받는 와중에 그 여성 분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동기' 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 그래. 과거에 일했던 환경단체에서 함께 신입활동가 교육을 받았던 동기였다. 우리는 교육 기수로 11기였다. 전국에서 50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었다. 아마 55명쯤이었던 것 같다. 출신지역도, 연령대도 다양했다. 당시 10대 후반의 막내부터 40대 후반의 큰형님까지 서로 간의 나이 차도 컸다. 각자의 배경도 다양했다. 전체 평균을 내면 그 여성 활동가와 내가 딱 중간 정도인 20대 후반이었다. 사실 나는 40대 형님들, 30대 후반 형님들과 친하게 지내느라 20대 여성 동기들과는 친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동갑이었던 여성들 몇 명을 제외하면 다른 여성 동기들은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암튼 그 '동기' 라는 단어 덕분에 이름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분명히 기억해냈다.
중간에 쉬는 시간에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정말 오랜만이야. 못 알아봐서 미안!"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는데, 그는 밝게 웃으며 "오랜만이예요. 이상하게 다른 동기들은 만날 기회가 없는데, 쌤은 그래도 가끔 보게 되네요. 신기해요." 아, 그 말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오래 전 동기 모임이 마지막이 아니라 그 이후로도 가끔 봤었다는 이야기인데. 허! 왜 나는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것일까? 그는 거기서도 봤었고, 저기서도 봤었고 이러면서 나와 만났었던 장소를 언급했다. 그리고 내가 자주 가는 우리 동네 거점 공간의 이름을 말하며 최근에 봤다는 말투로 말을 했다. 아! 하마터면 이게 십 몇년 만이지? 하고 물어볼 뻔했는데, 내가 미처 그 말을 하기 전에 그가 먼저 말을 해줘서 다행이었다. 앞서 언급한 함께 교육을 받았던 시기는 이미 20년도 더 전이었다. 마지막 동기 모임은 아마도 18년 전? 그 정도였을 것이다.
암튼 그렇게 막 반갑다고 한참 떠들던 와중에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친구, 전혀 나이든 티가 나지 않았다. 그 시절의 그 얼굴이 그대로 보였다. 아무리 동안이라도 벌써 20년이 넘게 지났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나는 이렇게나 확 늙어버렸는데. 서로 최근에 만났거나 온라인 상으로라도 소통하는 동기들 이름과 근황을 말하다가 우리 진짜 더 늙기 전에 소식이 닿는 사람들만이라도 동기 모음 한 번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 얘기는 몇 년 전에 다른 동기들을 만났을 때에도 늘 나왔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때와 그~때에도 꼭 그러자고 했었지. 그리고 잊어버리기 전에 우리는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나 정말 이 친구를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만난 적이 있긴 하구나. 내 폰이 이미 그의 이름이 저장되어 있었다. 번호가 다른 것으로 보아 최근에 저장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오래된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자 한 가지 뻔한 모습이 머리 속에 떠올라 또 부끄러워졌다. 정확히 언제였을지 모르겠지만, 그와 만났었던 그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내가 그때에도 똑같이 엄청 오랜만인 것처럼 말을 걸었다가 저기서도 봤었고, 거기서도 봤었고 이런 반응과 마주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아! 정말!
난치병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편이다.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자주 만나도 좋고, 가끔 보는 사람들은 가끔 보기에 더욱 더 좋다. 우연히 마주치는 인연은 그래서 더 특별해서 또 좋다. 이렇게 사람을 좋아하지만, 나는 또 그 만큼 혼자 조용히 지내는 시간도 좋아한다. 요즘 어딜가나 MBTI 이야기가 늘 나온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I' 와 'E' 중에 뭐냐고 물으며 헷갈린다고 말을 하는데, 나를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아는 분들은 대체로 'E' 라고 생각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세상에 어느 누가 딱 잘라서 내향형이고, 한치의 의심의 여지도 없이 외향형이고 그러겠는가? 그저 성향을 나타내는 지표 중 하나라고 이해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최근 여행을 가서는 'T' 와 'F' 를 두고 말들이 많이 나왔다. 6명이 1박 2일로 놀러간 자리에서 나를 포함해 4명이 T 라고 했고, 나머지 2명이 F 라고 했다. 그때부터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무슨 유행어처럼 "너 T야?" 라고 정색하며 말하곤 했다. 그러면서 F 두 사람은 서로를 위로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소수자의 비애를 느끼는 듯 연기했다. 예전에 한 때는 J 와 P 를 두고도 말들이 많았던 것 같고, N 과 S 를 두고도 어떤 유행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요즘은 T 에게로 화살이 가해지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정확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F 는 감성형으로 공감을 잘 하는 편이고, T 는 논리형이라 공감보다는 먼저 따지고 들어가는 편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려서부터 남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공감하지도 못했다. 나는 늘 스스로를 특이한 아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나만 혼자 동떨어진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여겼다. 특히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의 내가 그런 경향이 강했다. 잘난 것 하나 없는 주제에 내가 무척 잘난 놈이라 느끼며 나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고려하는 편이라고 자만하곤 했다. 공감 이라는 단어는 내게는 없는 것과 다름 없는 단어였다.
나이가 들면서 성향도 조금씩 바뀌고 성격도 좀 바뀌었다. 그리고 부산에서 부산 사투리 주로 쓰던 젊은 시절의 나와 지금 사투리 억양이 별로 남지 않은 (그렇다고 서울말이나 표준어를 잘 쓴다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 나이 든 나는 성격이 많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그럼에도 늘 고민이고 잘 되지 않는 것은 남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공감하는 것이다. 이거 참 쉽지 않다. 난치병이다.
10년 전의 강의
오늘 페이스북이 10년 전의 내가 쓴 짧은 글을 보여줬다. 그날 나는 녹색당에서 주최한 정희진 선생님 강의를 들으러 갔었다. 강의 장소는 환경재단 레이첼 카슨 홀이었다. 이날 나는 아이들을 돌보는 날이어서 퇴근하고 아직 어렸던 당시의 아이들을 데리고 간단히 뭔가를 먹인 후에 강의 장소로 데려갔다. 레이첼 카슨 홀은 이미 서 있을 자리도 없을 정도로 꽉 차 있었고, 아이들이 머물 장소가 없었다. 복도는 추웠고 다른 대기 장소는 전혀 없었다. 경비 아저씨가 머무는 아주 좁은 공간에 난로와 티비가 있었는데, 여기에 여분의 의자가 하나 있었다. 나는 경비 아저씨께 아이들이 여기 빈 의자에 앉아서 기다릴 수 있을지 여쭤봤고, 아저씨께서는 흔쾌히 허락하셨다. 아이들은 간이 의자 하나에 불편하게 끼어 앉아 난로의 온기를 쬐며 티비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나는 레이첼 카슨 홀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간신히 서 있을 공간을 조금 확보하고 강의를 들었다.
강의는 무척 흥미롭고 또 신선했다. 그날 따라 나도 아이들도 몸 상태가 썩 좋지 않고, 무척 피곤한 상태였는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해서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한참 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어쩌고 있는지 걱정이 될 무렵, 마침 작은 아이가 나를 찾는 걸 느꼈다. 상황을 보아하니 경비 아저씨께서 잠시 자리를 비우신 틈을 타서 아저씨께서 앉아 계시던 간이 의자 마저 아이들이 점령해 티비에 열중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작은 아이는 배가 고프고 졸리다고 나를 찾았던 것. 아무리 좋은 강의라도 배고픈 아이들을 외면하고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을 찾아 나왔다.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녹색당 행사에 아이들을 데려갔을 때마다 아이들은 피곤해하며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잠들었다. 나는 내려야 할 전철 역에서 양 팔에 하나씩 잠든 아이들을 안아 올려 내리곤 했다. 아이들의 가방들과 내 가방들도 당연히 챙겨야 했고, 아이들이 입은 두터운 잠바들과 내 잠바들이 한 쪽 팔에 하나씩 아이들을 동시에 안아 올리기 어려게 만들었지만, 어떻게든 힘으로 극복해야 했다.
제일 큰 난관은 개찰구를 지날 때에다. 교통카드를 찍어야 나갈 수 있는데, 양 팔에 하나씩 아이들을 안은 처지라 카드를 찍을 손이 없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아주 난감했는데, 그때 옆을 지나던 어떤 여성 분이 도와주겠다고 하여 잠바 주머니에 든 카드를 찍어달라고 부탁드렸었다. 그 다음부터는 개찰구까지 와서 도와주실 여성 분을 스캔하기 시작해 조심스럽게 부탁을 드리곤 했다. 아이들은 계단을 올라 역 밖으로 완전히 나서서야 찬 바람에 잠이 깨기도 하지만, 설잠에서 깬 탓에 더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작은 아이는 대게 더 내 품으로 파고 들었지만, 큰 아이는 그래도 맏이라고 내려서 걷곤 했다. 본인도 아직 어린데 그래도 언니라고 아빠를 배려한 것이다. 그때 역시 맏이였던 입장에서 내 마음이 참 아팠다. 본인도 어리광 부리고 싶고 더 안겨 있고 싶었을텐데. 짜증 하나 없이 투정 하나 없이 묵묵히 내 손을 붙잡고 걸었던 아이였다.
그랬다. 10년 전 그날 강의도 인상 깊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훨씬 더 나의 뇌리에 깊이 남아 있었다. 그날 내 품을 파고들며 칭얼대던 작은 아이의 온기와 말없이 내 손을 잡고 걷던 큰 아이의 손길이 지금도 느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