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JUNE
  • 사나운 애착
  • 비비언 고닉
  • 13,500원 (10%750)
  • 2021-12-22
  • : 5,559

걷기는 우리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끌어낸다. 나는 마흔다섯. 엄마는 일흔일곱이다. (12쪽)
아침에는 수동적이고 오후에는 반항적이던 엄마는 매일 새로 만들어졌다가 매일 풀어져버리는 사람이었다. 당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재료를 굶주린 사람처럼 붙들고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 애정을 보이다가도 일순간 어쩔 수 없이 이 생활로 끌려온 부역자처럼 느끼곤 했다. (26쪽)
우리는 엄마와 딸이 맞고,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혈연이니 효도니 하는 단어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반대로 가족이라는 개념,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 가족의 삶이라는 것 모두 해석이 불가능한 세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과연 그런 진실이 존재하나 싶어진다. (72쪽)
눈물은 바닥에 떨어지고 샘물처럼 솟아올라서 복도를 가득 메웠고 부엌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거실로 흘러들어 두 개의 침실 벽에 부딪쳤고 우리 모두를 떠내려가게 했다. (96-97쪽)
나는 엄마로 뒤덮여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나 있다. 내 위아래에 있고, 내 바깥에 있고 나를 뒤집어봐도 있다. 엄마의 영향력은 마치 피부조직의 막처럼 내 콧구멍에, 내 눈꺼풀에, 내 입술에 들러붙어 있다. 숨을 쉴 때마다 엄마를 내 안에 들였다. 나는 엄마라는 마취제를 들이마시고 취했고 풍요로우면서도 밀실처럼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엄마의 존재감, 엄마라는 실체, 숨통을 틀어쥐는 고통받는 여성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123쪽0
하지만 엄마는 알아듣지 못한다. (중략) 내가 엄마의 불안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엄마의 우울함에 완패해버렸다는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어떻게 알겠는가? 엄마는 내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데 엄마한테 말할까. 그건 죽음과도 같다고, 내가 여기 있는 걸 엄마가 모른다는 게. 절망과 혼란만이 가득한 눈으로 그저 멍하니 날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서른일곱 살 먹은 이 여자아일 못 본다는 게 슬퍼서 죽고 싶어진다고 말을 할까? 엄마는 또 언성을 높이겠지. "넌 날 이해 못해. 여지껏 한 번도 이해한 ㅈ거이 없어!" (161쪽)
한편 우리가 걷는 이 도시는 우리 안에서 끓어오르는 이 격정의 드라마에 길바닥 버전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190쪽)
나는 그를 사랑했다.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어느 지점까지만 사랑했다. 그 지점을 넘어가면 내 안에서 무언가 불투명해졌고 그에게 줄 게 없어졌다. 나에겐 그 불투명한 막이 보였다. 입으로 맛볼 수 있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었다. 스테판을 향한 내 감정과 나 사이에, 아니 어떤 남자가 됐건 그와 나 사이에, 확신할 수 없는 일종의 투명막이 드리워져 있고 나는 그 막으로 ‘사랑해‘라고 속삭일 수도 그 말이 들리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 말이 느껴지게 할 수는 없었다. (239-240쪽)
스테판, 데이비, 조. 그들은 제각기 너무나 다른 사람들처럼 보였고 따로 보면 그렇기도 했지만 나는 이 남자들과의 애착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이들과 잠시 잠깐 숨어 지냈을 뿐이었다. 그 남자들을 고른 이유는 그들이 나를 지금 이 순간으로, 즉 사람의 실패로 인해 마비돼버리고 침울해진 이 순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만 같았다. (294쪽)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중략)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세월만 가벼려." (중략) "그러니까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 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300-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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