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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 혼밥 판사
  • 정재민
  • 13,500원 (10%750)
  • 2020-07-24
  • : 691

<혼밥 판사>라는 제목이 입에 착 감기지 않았다. <혼밥>과 <판사>가 따로 노는 느낌이다. 마침 표지도 아래위가 다른 세상처럼 구분이 된 디자인이다. 요즘 시대에 혼밥이 드문 일도 아니어서 혼밥을 하는 판사라고 해서 그다지 신기한 일은 아니다. 


불운하게도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는 무려 900여 쪽에 달하는 <모비 딕>을 아껴가면서 읽은 터였다. 제목만 읽고 판사 양반이 유유자적하게 고급 음식점이나 맛집을 탐방한 이야기를 모은 책으로 생각했다. 삐딱한 자세로 읽어 나간 지 3분 만에 혼자 지내는 골방에서 육성으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깡치를 떼고 나면(쟁점이 복잡하고 다툼이 많아서 기록이 너무 두툼한 사건에 대한 선고를 마치고 나면) 마치 학창 시절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난 듯한 기분이 든다. 몸과 정신이 아주 피곤한데도 그동안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은 것인지 몸에 해로운 일탈을 하면서 더 놀고 싶어진다. 그런 날은 라면을 먹게 된다. 


뭔가 거창한 일탈(?)을 상상하다가 기껏 라면이라니. 거참 재미난 분이라는 감탄과 제대로 각을 잡고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임영웅이 부르는 노래처럼 독자를 밀고 당기는 탁월한 글쓰기 실력을 갖춘 작가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을 “시베리아 벌판에서 굶주리는 늑대”라고 지칭하던 어느 필로폰 중독자는 “칼에 꽂혀 있는 시뻘건 오소리의 간을 보고 그만 눈이 멀어서 핥아먹다가 아가리가 칼에 베이는 줄도 몰랐습니다”라며 마약의 중독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적도 있었다. 나도 옛날에 노란 냄비에 담겨 있던 뻘건 라면을 보고 그만 눈이 멀어서 핥아먹다가 나트륨에 몸이 베이는 줄도 몰랐다.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이토록 유머가 넘치는 글이라니. 급기야는 경외심과 감탄을 연발하면서 읽은 <모비 딕>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저자 정재민은 그만큼 매력적인 인물이고 <혼밥 판사>는 그만큼 재미난 장면이 이어져 있었다. 


이혼 재판을 이야기하면서 천연스럽게 내놓은 다음 구절도 혼자서 키득 키득 웃게 만든다. 


자기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토록 밝은 표정으로 들뜬 목소리를 내는 남편은 처음이었다. 그때 내가 대꾸할 겨를도 없이 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남편에게 삿대질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이 인간아. J가 네 사위다. 얼마나 집구석에 관심이 없으면 니는 네 사위 이름도 모르나?


암이 재발해서 죽음을 목전에 둔 모친이 평소에 좋아하던 칼국수를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 저자는 거절한다. 밀가루 음식이 환자에게 좋은 것이 없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얼마 뒤에 모친은 세상을 달리했고 저자는 마지막 만찬을 거절한 일을 후회한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이 이랬다


칼국수가 나왔다. 잘 빗은 머리칼처럼 질서 있게 차곡차곡 면발이 쌓여있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후회되는 일이 많은 것은 세상 모든 자식의 공통분모다. 내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실 때 내가 찾아 뵐때마다 어머니는 냉장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어머니의 간식을 나에게 권하셨다. 고집스럽게 권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의 몫이니 먹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언성을 높여가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때 맛있게 먹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혼밥 판사>는 음식 이야기와 판사 재직 시절 에피소드가 함께 하는 책이다. 내가 썼다면 에피소드 따로 음식 이야기 따로 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따로국밥이라고 해야겠다. 밥을 먹으면서 불고기를 반찬으로 먹는 그런 식이다. <혼밥 판사>는 재판 이야기와 음식이 함께 어우러진다.


맛있는 음식이 차려지는 가운데 재판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이런 책에서 드라마틱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그려지는 경우는 처음이다. 혼밥과 판사 이야기가 따로 노는 따로국밥인 줄 알았더니 고기와 국물이 잘 어우러진 꼬리곰탕과 같은 책이다. 욕심 같아서는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은은한 영상미와 감동이 밀려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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