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
회복하는 인간
훈자
에우로파
밝아지기 전에
왼손
파란 돌
노랑무늬영원
2003년부터 2012년까지 긴 시간에 걸쳐 발표한 단편 작품집이다. 전체를 하나로 관통하는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쓴 작품들이 아니다 보니 일관된 통일성이나 주제 의식을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작가 특유의 작품관을 확인할 수 있으니, 폭력적 남성성에 대한 거부감이 우선적으로 눈에 띈다. 작품 속 여자의 결혼생활은 가정 폭력과 결부된 사례가 제법 있다. 여자가 우호적 공감으로 추억하는 남자의 모습은 여성적 남성이다. 그들은 때로 여성이 되기를 꿈꿀 정도다.
작중 여자들은 여러 사유로 절망과 고통의 상황에 놓여 있다. 가정 폭력으로 비롯한 결혼생활의 실패, 교통사고, 가족 간 단절, 팍팍한 가정생활 등 원인은 다양하지만 칠흑 같은 한밤중의 막막한 처지에 놓여 있음은 유사하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을 방치하지 않는다. 비록 대낮처럼 환하지는 않더라도 어스름한 새벽빛이나마 그들에게 비춘다. 어쨌든 삶은 방기하지 않고 계속 영위할 가치는 있어야 한다면서. 이러한 경향성에서 벗어난 작품이 <왼손>과 <에우로파>라는 점은 시사적이다. 양자 모두 화자이자 주인공이 남자라는 공통점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하 각 작품에 대한 소회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피상적이다. 솔직히 읽는 도중에도, 읽은 후에도 작가가 글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확연히 다가오지 않아 그냥 내 맘대로 얼토당토않게 몇 자 억지로 끄적거린다.
<노랑무늬영원>
표제를 한창 오독하였다. 영원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도롱뇽과를 지칭하는 구체명사다. 노랑무늬영원은 실제 도롱뇽의 한 종이다. 난데없이 영원이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개를 피하려다 교통사고로 왼손을 못 쓰게 되고 오른손도 간신히 움직일 뿐이며 척추도 다친 여자. 그녀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다. 인생의 중심을 차지하던 그림을 더는 손댈 수 없게 된 그녀. 일상생활조차 혼자의 힘으로는 해나가기 어려운 신세가 된다. 여자와 남편 사이도 점차 불편하고 냉랭해진다. 부부 사이란 원래 그런 법인데 여자의 사고는 이를 가속하였다. 이건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다.
정말로 소중한 존재는 그것을 상실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녀는 삶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면서 삶에 대한 소외감을 절감한다. 그녀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고 해서 모두가 그녀처럼 느끼지 않는다. 예술가로서 그녀의 예민한 감각은 상실과 소외를 확장 수용하면서 허무감에 빠져든다.
그곳은 내 집이 아니다. 나에게는 집이 없다. 이 삶은 나의 삶이 아니다. 어떤 정서적 유대도 느낄 수 없다. 어떤 장소, 어떤 기억, 어떤 미래에 대해서도. (P.241)
삶의 무의미성에 허우적대는 그녀는 옛 친구의 우연한 연락으로 거의 잊히다시피 한 등산과 남자, 사진의 추억을 회상한다. 추억 속 남자의 죽음 소식을 알게 된 그녀는 문득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반불구가 된 오른손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도롱뇽의 잘린 앞발이 새로 생겨나는 것처럼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한다, 처음부터.
만일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진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나가야 한다면, 내 안의 죽은 부분을 되살려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부분은 영원히 죽었으므로.
그것을 송두리째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P.296)
그녀 자신이 인정하듯이 사고를 당한 것과, 이후의 삶의 태도가 필연적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그동안 그녀는 그림을 삶의 중심에 놓고 그림 속으로 도피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였다. 옛 친구 세 모자의 평범하지만 단란한 삶의 일상, 사진을 찍은 남자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한 과정에서 그림 이외는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삶의 양태를 그녀는 보게 되었다. 기존 작업과는 다른 그림 작업을 통해 계속 예술가로서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발상조차도. 문득 그녀는 자신의 손이 도롱뇽의 그것처럼 새로 돋아나옴을 느낀다. 그것은 가장 가벼운 동시에 가장 생생한 생명력의 표출이다.
<파란 돌>
한밤중 잔잔한 독백으로 풀어내는 담담하면서도 애틋한 연가. 연인은 이승이 아닌 하늘나라에 있다. 서른일곱의 여자는 자살을 앞두고 그를 떠올린다. 대개 그러하듯 자신은 잘 지낸다고 둘러대면서. 회상 속 남자는 전형적 남성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조금만 피를 흘려도 생명에 위험이 되는, 항상 언행을 느리고 차분하게 유지해야 하는 사람. 그런데도 끝내 저세상으로 떠나간 사람. 여자였기를 바라던 남자. 칠 년여를 함께 살았던, 그리고 여자의 목을 조르던 남자와는 정반대 유형의 남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그 입맞춤 이후, 나는 어떤 남자에게서도 더 이상의 기쁨을 얻지 못했습니다. 어떤 흥분과도, 무아경의 희열과도 바꿀 수 없을 겁니다. 나이만 먹은 소년이었던 당신의 겁먹은 손이 숨죽이며 내 뺨에 머물렀던 순간을. (P.211)
이 작품은 남편의 가정 폭력을 배경으로, 피해자 여성과 가해자 남성의 뚜렷한 대비를 통해 폭력적 남성성을 파헤친다. 그녀의 입맞춤은 이성 간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여성 간의 사랑에 가깝다. 깊은 어둠 속에서 진행된 독백은 서서히 아침을 맞이하며 분위기도 죽음에서 삶으로 변화한다. 여자의 연인은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삶을 갈구하였다. 삶을 버리고 죽음을 바라는 여자와는 다르다.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파란빛 도는 돌]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P.212)
날마다 운동하는 그녀의 루틴은 알게 모르게 이미 삶을 지향하고 있다. 살아 있음을 느끼는 건 신체의 역동성과 감각에서 가장 비롯하지 않는가. 여자가 문득 연인과 파란 돌을 떠올리는 건 고통과 비참 속에서도 삶은 이어져야 함을, 삶 속에서 생명의 본원적 가치가 존재함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왼손>
블랙 코미디 같은 단편이다.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섬찟함을 안겨주는 설정은 단지 주인공에게 발생한 개인적 재난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쓴다. 본능에 따른 충동만으로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남기 어렵다. 이성과 도덕률로 감정과 행동을 통제한다. 나의 왼손이 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매우 난처할 것임은 뻔하다.
가장 나쁜 것은, 왼손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것이 무슨 일을 하려 하는지 그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P.157)
왼손은 왜 갑자기 독자적 움직임을 개시하였을까. 아이가 생기면서 아내와의 가정생활이 순탄치 않게 되어서인지, 숙면을 취하지 못하여 신경이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서인가. 예전 여자친구 선혜를 알아차리고 버스 하차 벨을 누르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져 극적인 관계 진전을 이루어낸 것은 모두 왼손 덕분이다. 그렇게 보면 왼손은 주인공의 숨겨진 본능을 간취하는 능력이 탁월한 모양이다.
일시적 성공은 영원하지 못하다. 사람이 본능만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없듯이 성진 또한 선혜와의 관계에 갈등한다. 그가 이성을 강하게 의식할수록 왼손의 저항은 강렬해진다. 회사에서 그리고 선혜와의 관계에서, 마침내는 아내에게서 그는 버림받고 파국에 놓인다.
혹시 그런 경험 해봤어? 내 안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있는 것 같은 때. (P.152)
이것은 선혜의 말이지만 성진의 처지를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 평범한 유부남인 성진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우리는 그를 향한 안타까운 동정심을 금할 길 없다.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라고, 그에게 근원적인 잘못이 있던가. 세상 누구도 성진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게다가 이 작품은 결혼생활에 대한 근본적 의구심을 제기한다. 성진의 결혼생활, 선혜의 결혼생활을 볼 때 과연 행복한 결혼생활이란 가능할까.
<훈자>
훈자, 파키스탄과 중국 국경지대의 산간 오지. 그녀는 언제나 훈자를 생각한다. 그곳은 그녀가 일상에서 벗어나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므로. 그곳을 향한 소망을 떠올리며 일상의 고단함을 버텨낸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주변인에 머무는 남편, 가계를 꾸려나갈 단 한 사람인 그녀, 그리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아이. 그녀는 알고 있다. 자신이 훈자에 갈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그럼에도 훈자를 꿈꿀 수 있기에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훈자인 훈자도, 훈자가 아닌 훈자도 생각하지 않았다. (P.52)
그녀는 왜 훈자를 생각하지 않는가. 팍팍한 삶이 더는 훈자 생각만으로 위안 삼을 수 없도록 악화하였음이 아니겠는가. 다친 아이, 고단한 업무. 피곤 속에서 그녀는 도로 위 핸들을 굳게 다잡는다. 죽은 들고양이 따위로 무리하게 차선을 바꿀 수는 없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견뎌낼 것이다. 그녀의 모습을 두고 왈가왈부 촌평을 하는 건 적합하지 않다. 그녀는 전심전력으로 삶을 다투고 있기에.
불안하게 큰 커브를 돌며 그 여자는 눈을 부릅뜬다. 앞차가 뱉어 내는 브레이크 등의 불빛이, 끈덕지게 술렁이는 도로의 어둠이 핏물처럼 그 여자의 눈에 비쳐 어른댄다. (P.58)
<회복하는 인간>
괜찮아. 진짜 금방 낫는대. 시간만 지나면 낫는대. 누구나 다 낫는대. (P.31)
육신의 상처는 금방 나을 수 있다. 주인공인 당신 발목의 화상은 더디지만 어쨌든 회복될 것이다. 마음의 상처는 금방 나을 수 있을까. 어느 날 마음이 갈라져 버린 당신과 당신 언니의 관계는 결코 회복되지 못하였고 앞으로도 회복의 가능성은 없다. 그녀는 이 세상에 없으므로.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P.34)
이것이 당신의 잘못인가.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되돌릴 수 없다. 독자의 눈에 결코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당신은 계속 자책한다. 당신이 조금만 더 다가섰다면 관계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면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그녀의 생각은 서글픔을 넘어 깊은 슬픔을 담고 있다.
<에우로파>
화자와 인아는 남사친, 여사친의 관계다. 인아는 의사 남편과 이혼하였다. 원인에 가정 폭력이 있었음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인아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장례식에 비유한다. 인아의 아름답고 낯선 노래를 들으면서 화자는 자신의 숨은 욕망을 불현듯 드러낸다.
(너 같은 목소리를 갖고 싶고, 너 같은 몸을 갖고 싶어. 어떤 밤에는, 그 갈망 때문에 미칠 것 같을 때도 있어.) (P.77)
이제 그들의 관계는 새로운 장으로 넘어간다. 두 사람은 이제는 이성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남성성의 폭력을 경험한 여자와 스스로 남성성을 버리고자 하는 남자. 두 사람에게 남성성은 부정적 요소다. 인아가 꾸는 악몽도 본질은 동일하다. 화자는 여장을 한 채 도시의 번화가를 거닐며 환상에 사로잡힌다.
얼음으로 뒤덮인 목성의 위성 에우로파처럼, 우리네 삶은 단단한 껍질 속에 연약한 속살을 감춰 둔 채 세상에 맞서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즐거움보다는 아픔이 더 많은 삶의 순간일 것이다. 에우로파가 커다란 운석을 피하지 않듯 삶의 매 순간은 회피할 수 없다. 인아는 묵묵히 버티면서 행로를 찾아 헤맬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위선의 탈을 뒤집어쓴 화자의 앞날은 어떠할지 알 수 없다.
<밝아지기 전에>
남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책감은 은희 언니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꾼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맨정신으로 남들처럼 평온한 삶을 산다는 건 더는 그녀에게 불과한 일이 되었다. 수년이 지난 후 화자가 외국에 사는 그녀를 만나러 가기 직전 그녀는 시신으로 귀국한다.
화자는 지난 연말 K 선생님의 전시회에 갔다가 그가 말하는 그의 심장과, 그의 친구 전시회에서 본 그의 친구의 심장 얘기를 떠올린다. 거대하고 끔찍한 덩어리로서의 심장과, 아주 조그마한 0.3밀리 샤프펜슬로 나타내는 심장. 본질에 있어 크기는 중요치 않다, 고통은 마찬가지이므로.
하늘은 파랗고, 차가운 햇빛이 우듬지의 윤곽을 에워싸고 있다. 한동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올려다보다가, 내가 그것들을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냉혹할 만큼 완전하게 은희 언니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P.104)
삶은 고통으로 충만하지만, 내내 어둡고 슬픈 것은 아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밤이 여위면 새벽이 다가오듯. 밝아지기 전이 가장 어둡듯이 우리는 눈앞의 빛을 알지 못한 채 당장의 어둠에만 몸부림치기에 십상이다. 두루미 종류의 흰 새의 죽음, 은희 언니의 죽음에서도 화자는 무심코 세상의 아름다움을 본능적으로 인식한다.
은희 언니는 돌아올 거라고 했다. 돌아오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 거라고 했다. 후회와 고통만이 점철한 삶이 아닌 삶을. 자책하지 않는 삶을. 그것은 화자가 딸 윤이와 함께 하는 삶과 멀지 않은 삶이리라. 생과 사의 경계에 올라선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생명력으로 그득한 삶. 그래서 화자는 문장을 고쳐 쓴다. 회복된 것은 은희 언니만이 아닐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문장을 지우고 기다린다. 온 힘으로 기다린다. 파르스름하게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그녀가 회복되었다, 라고 첫 문장을 쓴다. (P.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