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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들갑이라고 해야 할까. 어렸을 때부터 그런 성향이 있었던 것 같다. 난생 처음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작은 영화관에서 영화 1편을 보고 나서는, 흥분한 정도를 뛰어넘어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여주인공의 사랑스러움과 남주인공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굳이 전하려 했다. 추억의 영화는 데미 무어와 패트릭 스웨이즈 주연의 <사랑과 영혼>.

 



호들갑 증상은 지금도 여전해 새롭게 발견한 작가에 대해서는 ‘진짜, 진짜 최고’라는 말을 남발하는데, 이제는 그 호들갑을 받아줄 사람이 없어 우리집 아기들이 가여운 청자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10번 중에 서너번은 추천에 성공하니, 아직까지는 내 느낌을 자랑스러워하고 싶은데, 얼마 전에는 내가 그렇게나 칭송해 마지 않던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를 큰아이가 읽었다. 다행스럽게도 내게서 호들갑 유전자를 물려 받지 않은 아이는 담백하게 말했다. 진짜 잘 쓰는 거 같아.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어도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네. 역시 번역의 문제가 아니야. 그렇지? 좋지? 진짜 장난 아니지?라고 묻는 호들갑 어머니를 남겨두고 아이는 조용히 방문을 닫는다.

 

 


















레이 브래드버리만 그럴까. 난 로스를 알고 나서는 로스만 읽었다. 『위대한 미국 소설』은 네 장만 읽어도 짜증과 실망을 부르는 문장이 등장하지만, 아직까지도 내 사랑은 유효하기에 난 또 『위대한 미국 소설』을 짬짬이 아껴가며 읽는다. 로스의 작품 중에 가장 깔깔거렸던 소설은 『포트노이의 불평』. 1969년 출간 당시 미국 도서관들이 금서로 지정하고, 호주에서는 금수 조치되어 펭귄북스가 밀매까지 단행했던 시대적 문제작(알라딘 책소개)인데, 내게는, 식사 시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에 들어가 땀을 뻘뻘 흘리는 그 장면이 정말 1도 야하지 않았다. ‘인간이야 쥐야?’를 비롯한 명대사에서 풍겨나는 자식에 대한 유대인 부모의 절절한 집착이 그 작품의 진정한 관전 포인트다. 나중에 그의 자서전 『사실들』을 읽고 나서야 작품 속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의 실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의 첫번째 아내를 혼합해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됐다.

 
















마거릿 애트우드를 알고 나서는 다른 소설가들이 시시해 보였다, 죄송하게도. 『시녀 이야기』도 물론 좋지만 <미친 아담 시리즈>는 정말 미치도록 좋다. 『그레이스』도, 『증언들』도, 읽기 힘들었던 『눈먼 암살자』도 완벽했다. 그녀의 소설은 완벽하다. 완벽하다는 것이 그녀 소설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킨』과 『블러드 차일드』를 읽었을 뿐이지만, 옥타비아 버틀러가 선사하는 서늘함과 공포는 그녀의 글을 읽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느낌이다. 어쩌면 그녀가 글로 풀어내기 전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감성일지도 모르겠다. 『블러드 차일드』에는 단편소설 7개와 에세이 2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작가는 작품마다 후기를 남겼다. 표제작 <블러드 차일드>를 노예 이야기로 보는 사람들 때문에 놀랐다는 그녀의 말에, 내가 더 놀랐다. 아주 다른 두 존재 간의 사랑 이야기이며, 소년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남성 임신에 대한 이야기인 것은 확실하지만, 평범한 독자인 내게 이 이야기는 분명 노예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추측 역시 그녀가 가진 인종적 배경 때문은 아닐까, 그녀의 글을, 그녀의 가치를 그 정도로 제한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의심 또한 이 놀랍고도 무서운 <블러드 차일드> 읽기의 한 부분일테다.

 

 

책 뒤쪽의 <에세이>에서 버틀러는 흑인 여성이었던 자신이 어떻게 두려움과 맞서며 작가가 될 수 있었는지 이야기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자주 느끼는 거지만, 흑인 여성들은 우리네 어머니와 비슷하다.

 

백인 노예 농장주, 백인 농장 관리자, 흑인 농장 관리자, 그리고 노예인 흑인 남성까지. 그녀들을 둘러싼 남자들은 모두 그녀를 억압했다. 흑인 여성에게 희망은 오직 자식 뿐이었고, 어머니가 노예라는 이유로 그 아이들은 모두 노예가 될 운명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물려주지 않으면서도 자식의 생존을 위해, 그녀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그 속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았고 웃음을 잃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원망하지 않으면서도 검은 피부의 자녀가 위엄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라게 했다. 나는 흑인 여성 내부에 존재했던 이런 긍정적인 에너지에 대해 항상 감탄한다. 자유는 이미 그녀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었고, 그녀들은 결국 자신의 자유와 자식의 자유를 쟁취했다. 끝내 살렸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런 역동적인 활력을 옥타비아 버틀러의 글속에서 만날 수 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마지막까지 부조리한 삶에 맞서되, 심각한 척 하지 않는 담담함이 그녀의 글에는 녹아 있다. 그녀의 글은, 끈질긴 생명력을 품은 이 책은 이렇게 끝난다.

 


가끔 인터뷰를 할 때, 인터뷰 담당자가 나의 ‘재능’이나 ‘타고난 재주’를 칭찬하거나 어떻게 그런 재능을 발견했냐고 묻는다. (모르겠다. 옷장 속이나 길거리 어딘가에 누워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나는 이런 질문에 정중하게 답하려고 하고, 나는 글쓰기 재능이라는 것을 별로 믿지 않는다고 설명하려고 노력하곤 했다.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저 쓰거나, 쓰지 않는다. 결국 나는 나의 가장 중요한 재능, 혹은 습관은 집요함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집요함이 없었다면 나는 첫 장편을 완결하기 훨씬 전에 글쓰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우리가 그저 포기를 거부하는 것만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면 놀랍다.

이 책만이 아니라 내가 한 모든 인터뷰와 강연을 통틀어서도 이것이 가장 중요한 말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글쓰기 너머까지 적용되는 진실이다. 중요하지만 어려운 모든 일, 중요하지만 겁이 나는 모든 일에 적용할 수 있는 진실이다. 우리 모두는 보통 스스로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물고 늘어져라! (282쪽)

 

 


호들갑은 나이가 들면서 사라졌으면 한다. 나이가 들어가니 호들갑도 덜해지리라 믿는다. 그렇게 믿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순순히 호들갑을 포기해야 한다면. 늙지 않고 싶다. 늙을 수가 없다. 내게는 아직, 옥타비아 버틀러와 같은 가슴 떨리게 하는 작가가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고,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들 또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이 책들을 다 읽을 것이다. 호들갑을 버려 침착해진 대신, 수명을 얻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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