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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 콤플렉스』를 읽다 보니 ‘프로이트-거세공포-남근선망’ 연결망을 따라 예전에 읽었던 『남근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나는 마리 루티의 책을 두 권 밖에 읽지 못 했지만, 그녀를 정말 좋아한다. ‘프로이트가 여성혐오자?’라는 제목의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랫동안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여성혐오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여성들이 ‘남근선망’으로 고통받는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들어가 이 주장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프로이트 책을 방구석에 집어 던지며 외쳤었다. “미친 새끼!” …. 그러나 지난 30년간 페미니즘 이론과 관련 분야를 공부하면서 나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다른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페니스 소유자에게 명백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이익을 주는 사회에서 여성이 페니스를 부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둔감한 것이 아닌가? (5쪽)

 


이래서다. 이래서 내가 마리 루티를 좋아한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의 이론에 비판적이었지만, 『꿈의 해석을 읽다』의 양자오의 말처럼 프로이트를 비판하는 쉬운 일에서 벗어나, 그가 가진 한계와 논리적 비약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는 프로이트식 세계 해석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임은 분명하다.

 


남근 선망은 비판을 가장 많이 받는 부분이다. 여자 아이는 남동생 혹은 오빠를 통해 자기에게 없는 ‘그것’을 가진 그들을 부러워하고, 자기처럼 ‘그것’이 없는 어머니를 원망하며, 자기에게 ‘그것’ 혹은 ‘그것’의 대체물인 ‘아이’를 선사해 줄 수 있는 아버지를 동경한다는 것이다. 여자 아이가 원하는 ‘그것’은 축 늘어진 작은 살덩어리 ‘그것’이 아니라, ‘그것’이 선사하는 각종 사회적, 경제적 특권임을, 이젠 모든 사람들이 안다.

 

그의 환자 중 한 명이었던 도라 사례 연구 역시 그렇다. 14세에서 16세 사이였던 도라에게 접근해 성적으로 그녀를 유혹했던 K씨에게 도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이후에 히스테리 증상을 보였다. 도라의 아버지는 K씨의 접근은 도라의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도라 아버지의 설명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도라의 이야기를 자신의 정신분석학적 이론에 맞추어 재구성했다. 프로이트는 도라가 실제로는 K씨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도라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들을 프로이트는 ‘예’라고 추정했다. 도라의 판단, 도라의 기억, 도라의 진술보다는 자신의 해석 능력을 강조하는 연구자, 독재적인 연구자의 모습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하지만, 매일 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꾸고 있는 수많은 꿈들이 미래에 대한 예시나 일그러진 환상이 아니라, ‘꿈은 (억압된) 소망의 (위장된) 충족’이라는 명료한 주장은 그에게서 나왔다. 히스테리가 육체적 원인들보다는 유아기에 경험한 성적 장애들과 연관된 정신적 기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46쪽) 역시, 당시 일반인들은 물론 기존의 신경증 관련 질환 연구자들조차 상상할 수도 없었던 가히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수많은 페미니스트들, 또는 다른 철학자들을 통해 해체에 가까운 비판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여성성과 남성성이 고정된 정체성이라기보다는 변화가능하다는 그의 입장(103쪽)이나, 성교에 다다르지 않는 모든 성적 행위를 도착으로 간주했던 당시의 관점에 반대하며, 성욕이 가진 종족 번식 이상의 의미를 주장(107쪽)했던 것 역시 그의 '선구자적' 안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감정적 고착들을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우리 자신에 대한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관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런 프로이트이다. (101쪽)

 


정신분석학적 해석 방식들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는 단순히 텍스트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읽기 과정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 다시 말해 읽기 과정에는 항상 창조 또는 허구적 구성 과정이 수반된다는 점이다. (236쪽)

 

 


이 두 문단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우리 자신에 대한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관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 안에는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 읽고 이해하는 기술로서 정신분석학이 갖는 의미. 기억의 조합, 재구성 그리고 창조 과정으로서의 읽기. 그리고 그 중심에 위치한 프로이트라는 천재 혹은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그럼에도 역시 천재.  

 


1000개 혹은 10,000개 중에 하나 혹은 둘을 배웠다. 내일부터 『프로이트 패러다임』 읽기를 시작하겠지만, 일단 여기까지. 

오늘의 진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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