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찾은 원불교의 영성
소태산이 밝힌 정신개벽의 길
2025. 7. 16(수)
유년에 교회에 몇 번 나가고 소풍으로 절에 다녀 본 경험 외에 특별히 종교, 특히 유일신에 대한 믿음은 없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종교에 관해 알아보고 싶을 때 종교 문해력을 키워야 한다는 기획 의도로 출판된 [종교 문해력 총서] 다섯 권을 읽는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라는 세계 종교와 민족 종교인 원불교를 다룬다. 원불교는 불교의 한 분파이겠거니 생각하고 관심 두지 않았다. 원불교 대종법사 박중빈, 『소태산이 밝힌 정신개벽의 길』은 종교 문해력 총서 중 다섯 번째다. 소태산은 정신개벽을 제시하며 한국의 민족종교에서 세계 보편종교를 지향했다.
첫째, 불교와 원불교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라는 문제의식으로 읽는다. 둘째, 원불교가 추구하는 교리와 핵심은 무엇인가? 셋째, 소태산이 살았던 시대상과 소태산은 어떤 인물인가?
소태산은 물질이 개벽된 시대에 인류는 물질의 노예 생활을 면하지 못하고 있고 세상은 병들어가고 있다고 보았다. 그 해법으로 정신개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소태산의 영적 여정은 ‘이 뭐꼬’를 통한 이치적 해법만이 아니라 ‘이 일을 어찌할꼬’하는 실천적 해법까지 포함된 것이다. 나아가 불교혁신을 실천하였다. 소태산은 스스로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고 일렀다. 소태산의 처방은 일원상(一圓相) ‘○’으로 제시된다. 이 자리는 우주의 근원이자, 우리의 본성이자, 성자들의 깨친 진리이다.
첫 번째 문제의식, 불교와 원불교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붓다는 모든 것이 고통(괴로움)이라고 선언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해탈이라 하고 길을 찾는다. 소태산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은혜 아님이 없다고 선언한다. 붓다는 우리가 접하는 현상세계는 모두 변하는 것(無常)이며, 무상하기에 불만족스러운 것(苦)이며, 실체라 할 만한 것이 없음(無我)을 밝혔다. 사성제에서 모든 것이 괴로움(고)임을 선언했다. 소태산이 바라보는 현상세계는 그냥 낱낱의 현상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연기된 하나의 법계이다. 생멸 변화하는 현실 세계의 모든 존재가 근본적으로 큰 은혜, 즉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은혜가 베풀어지는 모습을 잘 알고, 그 은혜에 보답하자는 지은보은(知恩報恩)의 관점에서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하자는 것이다. 사례로 제시한 부안 변산 실상사에 불공하러 가던 노인 부부의 일화(정성)를 전한다. ‘산 부처’에게 공양하라는 실지불공(實地佛供)의 사례다.
두 번째 문제의식으로 원불교가 추구하는 교리와 핵심은 공동체를 중시하여 남녀를 동등하게 보고 단이라는 조직으로 교단을 운영하였고,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원불교 교리의 핵심을 담은 교리도를 제시한다(p. 243).
원불교는 ‘공동체’를 삶의 터전이자 영적 기반으로 중시한다. 공동체 운영에 필요한 네 가지 요건을 사요로 밝힌다. 자력양성(自力養成)은 정신의 자주력, 육신의 자활력, 경제의 자립력을 포괄한다. 지자본위(智者本位)는 지혜로운 사람에게 잘 배우자는 의미이고, 타자녀교육(他子女敎育)은 내 자녀와 남의 자녀를 구분하지 말고 누구든지 배울 수 있도록 평등한 교육여건을 만들어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공도자숭배(公道者崇拜)란 공동체마다 그 공동체에 헌신하는 이들을 잘 받들어 모시자는 것이다. 사요는 21세기에도 유의미한 실천윤리라고 할 수 있다.
소태산은 일상생활에서 함께 공부하고 사업하는 최소 단위로 단(團)을 운영하였는바 단원이 직접 참여하는 통치의 공간이었다. 1931년 <불법연구회통치조단규약>에 따라 단을 구성하였다. 붓다가 승가를 통해 법륜을 굴렸듯이, 소태산은 이 단을 통해 그 뜻을 펼치고자 했다. 단은 출가만의 조직도 재가만의 조직도 아니었다. 누구든 앞으로 공부와 사업을 위해 참여해야 할 최소의 조직이었다, 단을 통해 공부와 사업, 수도와 생활을 매개했으므로 단은 회상(會上, 대중이 모인 법회) 운영의 구심체이자 실행체였다.
소태산은 일찍부터 남녀권리동일을 주장했다. 타원이라 이름지어 9명의 여성 지도자를 인정하고 양성한 일은 근대라는 시대적 요청과 개벽 시대의 주체로서 여성의 역할에 주목하고 이를 제도적으로나 실질적으로 구현하려 하였다.
소태산은 세간(재가)과 출세간(출가)의 구분은 하지만, 차별을 두지 않았다. 특히 공부와 사업, 법계(法系) 등에 주객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공부(수도)의 처소도 신자가 많이 있는 곳에 두도록 했다. 직업을 통해 각자의 의식을 해결하도록 했으며, 결혼은 자의에 맡겼다. 출가와 재가에 상관없이 공부 정도에 따라 법위를 얻었고, 지도자로서 역할을 하게 했다.
1943년 소태산의 제자들이 중진 간부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정산을 후임 종법사로 추대하였고, 정산은 일제 말기와 해방 전후의 혼란기를 이겨내고 ‘원불교’의 교명을 대외적으로 선포하였다. 불법연구회는 선포 이전에 쓰던 이름이다. 정산 송규(원불교 2대 종법사, 재임 1943~1962)는 해방 이후에 어떤 정치가 보다 빨리 <건국론>을 지어 정치요인들에게 전했고, 해방 이후 귀국한 동포들을 위한 구호 사업인 전재동포구호사업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세 번째, 소태산이 살았던 시대상과 소태산은 어떤 인물인가?
소태산은 ‘무엇을 모르는가?’ 대신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한 고민을 하였다. (P.44) 11세부터 만 4년을, 햇수로는 5년을 기도했다. 10대 소년이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오랜 기간을 한결같은 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시기에 일심 정력을 얻게 되었고 이후 큰 깨달음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11세 연산인 유성국과 이인명은 훗날 소태산의 아홉 제자 중 한 사람이 된다. (P. 53) 소태산의 대각일성으로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응보 되는 이치가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P. 73) 소태산이 맨 먼저 했던 일은 조합을 결성하고 첫 사업으로 법성포로 향하는 와탄천의 조그만 강줄기(보은강) 주변으로 갯벌에 언을 막아 논을 만드는 간석지 개간 사업이었다. 소태산은 3.1 만세운동의 외침을 묵은 세상을 떠나보내고 새 세상을 열어가는 ’개벽을 재촉하는 상두소리‘라 했다. (P.97) 소태산의 깨달음과 영적 지향은 개벽과 불법의 만남, 즉 개벽이라는 시대적 요구와 불법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어우러진 것이다. (P. 117)
덧붙이는 잡다
수운 포덕 이후 동학 세력이 급속히 확산하자, 이에 놀란 영남 유림이 크게 반발했다( P. 38)
원불교에서는 법신불 일원상을 모신 곳을 ’대각전‘이라 한다(P.124)
원불교 신자라면 누구나 암송하고 있는 원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은 <심불일원상내역급서원문>이다 (P. 129)
실지불공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든, 어떤 일을 당하든 그 대상과 상황에 맞게 정성을 다하는 모든 행위 그 자체이다(P. 158)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모두 ’나(ego)’자신의 욕심 때문이다. 그 ‘나’를 벗어나 ‘일원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p. 159)
불법연구회 공동체는 ‘수도아 생활이 둘이 아닌 산 종교’로서 면모를 갖추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p. 187)
1930년대 중반 불법연구회는 조선총독부 촉탁 일본인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조선의 풍수를 지었다.)의 관점에 따라 유사종교라는 명분 아래 불법연구회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본격화했다(p.225)
1937년 8월 10일자 신문에 ‘불교혁신 실천자 불법연구회 박중빈씨’라는 제목의 기사는 박중빈을 “조선불교사상에 루터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했다(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