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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 정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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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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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그리스도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2025. 6. 29(일)

어릴 때 교회에 몇 번인가 다녔던 경험만이 신앙의 전부인 무신론자가 [종교 문해력 총서 3 기독교] 를 읽는다. 성경을 정독하거나 배워 익히지 못했기에 기독교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학교에서 세계사 시간에 배운 종교적 사건들과 신·구교의 분리, 수많은 종파에 관한 조각난 지식뿐이다. 종교를 믿음의 문제로서만이 아니라 이해의 문제로 인식하자는 총서의 집필 기획 의도를 따른다.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를 읽어도 기독교를 모두 이해할 수 없다. 읽어가며 밑줄 친 내용들을 정리하며 저자의 문제의식과 저술 의도를 알고 단편적인 지식을 얻는다.

 

프롤로그에서 예수의 전기, 예수 이야기가 시대마다 문화마다 계속 나오는 이유를 예수를 재현하는 ‘해석’이기 때문이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패러다임으로 풀고 있다. 예수가 탄생하던 시기를 서구 역사의 어느 시점에 두어야 하는지 헷갈리지 않으려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에 따라 호적 등록을 요구하던 사실을 기억하면 좋다. 예수의 길과 관련지어 “자기가 길을 식별하고 선택해야 한다. 선택의 기준은 얼마나 빠른가, 얼마나 쉬운가가 아니라 얼마나 바른가?”(p.19)이다. 우리의 삶의 길도 마찬가지다.

 

우리말 성서에 개역, 공동 번역, 새번역 성서가 있다. 아람어나 그리스어에는 반말과 존댓말의 구분이 없는데, 번역 성서에서 예수의 말을 모두 상대를 하대하는 반말체라고 지적한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복음서를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라 부른다. 경전 중심의 종교성은 세계 종교로 결정짓는 조건이다.

예수를 묘사한 그림은 대략 여섯 가지 종류가 있다. 가장 익숙한 예수의 얼굴은 미국 화가 워너 셀만의 1940년 작품 <그리스도의 머리>로 부드러운 곱슬머리에 잘생긴 백인 예수가 지긋이 위를 올려다보는 모습이다. 김선지 작가의 『뜻밖의 미술관』에서(p.26) 풀어준 것이다. 디지털 기술과 포렌식 기법으로 팔레스타인 만자의 얼굴 특징을 반영해 형상화한 예수, 1999년 자넷 맥킨지가 그린 <민중의 예수>는 예수를 흑인으로 상상하고 표현했다. 인도인 화가 솔로몬 라지가 그린 <스승 예수>, 1974년 에디위나 샌더스가 그린 <크리스타>는 ‘여성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프리츠 아이헨베르크의 1951년 작 <빵 배급 줄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 노숙자였다. 스리랑카에서 그린 <야곱의 우물가의 예수와 사마리아 여자>에서는 예수를 불교적으로 해석한다. 각각을 검색해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패러다임을 볼 수 있다. ‘예수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그리자’라는 부분에서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윤리는 보는 것이다”를 소개하며 고통을 당하는 타자의 얼굴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경계하고 두려워한 것은 유대교 신앙과 삶의 길을 새롭게 해석하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유대인 예수를 이해하려면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던 유대인의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갈릴래아는 유대 세계의 변방으로, 가난하고 작은 자들이 고통당하며 살고 있던 땅이었다. 문형배 전헌법재판관이 말한 창조는 변방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을 떠올린다. 그리스도는 메시아다. 예수가 탄생한 지 30년 뒤 예수를 따르던 제자 베드로는 스승 예수를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고백한다. 성경에 유소년, 청소년기 이야기가 없는 것은 그때까지는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한다. 로마 제국과 헤로데 왕국과 성전(로마의 다문화 통치 정책에 따라 자유와 특권을 누리던 성전 세력은 성전세를 위한 환전과 제물 매매 독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의 삼각 지배 동맹이 통치하고 있던 예루살렘에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위험한 길이었다.(p.225)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고통받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으로 돌아온 대승적 신비가들의 자비와 사랑에서 시작했다.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이종 사촌 간이었다. “우리도 예수처럼 실수하고 실패하면서 자기 소명을 찾아 살고 죽었다는 사실은 우리도 예수의 길을 따라 마음과 용기를 내게 해준다.”(p.89)

 

종교는 역사 속에서 교리, 의례, 조직 등이 제도화되면서 관습적 지혜로 변질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가운데 새로운 종교 운동은 전복적 지혜로 출발한다. 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종교사적으로 인간의 신 관념은 애니미즘, 토테미즘, 다신론, 단일신론, 유일신론으로 발전했다. 현대에는 이신론, 범신론, 범재신론도 나타났다.

‘나’의 행복은 ‘너’의 행복과 연결되어있다는 상호연결성을 깨닫는 것이다. 공동체성의 각성과 공동체의 구성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p.119)

2022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사회 인식 비교 조사를 통해 개신교 교회가 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고 비개신교인의 62.2%가 인식하고 있다. 개신교인 중에서도 개신교가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고 응답한 자가 30.5%가 된다.

물질주의는 인류의 아주 오랜 질병이다. 버트런트 러셀의 말처럼 “자유롭고 고귀하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소유에 대한 집착이다.”(p.127) 우리의 소유가 우리의 자유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 그리고 물질주의에 갇힌 사회의 우리가 맘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예수를 본받는 것이다. 안식일은 종교적 율법이 아니라 가난한 자, 약자를 위한 사회적 율법이었으나 유대 종교 엘리트들은 안식일 준수를 종교적으로 제도화했다. 예수는 ‘무조건적 환대’를 강조했는데, 경계 없는 접촉, 공동식사, 소수자, 약자와의 존재론적 동일시라는 행위를 요구한다. 신자유주의의 핵심 원리는 각자도생인바, 돌봄을 인간성과 인간됨의 기본으로 제시한다.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것이 돌봄 민주주의의 인간론이다. “우리는 길을 만들고, 길은 우리를 만든다.”(p.195) 고독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중보기도란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한 기도다. 개인주의와 경쟁주의에 찌들어 외로움과 불안한 삶을 질병처럼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중보기도의 의미를 되뇌자 한다. 유월절은 히브리 조상들이 파라오의 압제와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다.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된 것은 로마의 박해가 끝난 4세기 이후의 일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 문양을 병사들의 방패에 새기고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하나 후에야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에서 승리와 영광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무신론자인 독자가 읽은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는 그리스도교 입문서는 아니다. 개신교를 믿으라는 요구도 없다. 종교를 이해하려는 시도에 맞춘 내용이다. 2000년 전의 예수를 현재의 관점에서 이해하자는 것이다. ‘갈릴래아의 예수’에서 중심부와 변방이란 구조로, ‘전복적 지혜’에서는 새로운 관점으로 예수와 기독교를 본다는 이야기이며, 다른 장에서는 무조건적 환대와 공동체의 삶 등을 번 아웃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대안으로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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