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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 김명임 외
  • 18,000원 (10%1,000)
  • 2024-08-30
  • : 1,104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 《치인의 사랑》에 등장하는 여성 ‘나오미’는 1920년대 일본에서 대중소비사회의 새로운 주도자로 떠오른 ‘모던걸’의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모던걸은 전통적인 의복에서 벗어나 단발과 양장 등의 겉모습으로 대표되었으며 기존 여성의 정조 관념에서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낭비벽이 심하다거나 성적으로 타락했다며 멸시당하기도 했는데, 소설 속 나오미 역시 자기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 당시 일본 사회에 ‘나오미즘’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조선에서도 전통적인 여성의 이미지에서 탈피한 엘리트 여성 집단인 ‘신여성’이 등장했다.


  《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는 근대잡지 《신여성》에 재현된 여성의 생활상을 좇으며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공적공간에 나타난 신여성이 다시 집 안에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맡게 된 과정을 살핀다. 남성들은 기존 조선의 여성들과 달리 교육을 받고 대중문화와 유행을 따르는 주요 소비층으로 부상한 신여성을 계도의 대상으로 여기는데, 남성 필진이 70%에 달했던 《신여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역설적으로 이 남성의 시선에서 신여성의 새로운 욕망과 언어 습관, 생활 양식을 읽어낼 수 있음을 짚으며 《신여성》 읽기의 의의를 제시한다. 1930년대 들어 신여성의 역할이 가정주부로 변화하면서 《신여성》도 여성의 노동 참여와 전문적이고 과학적인 육아를 동시에 요구하기 시작한다. 노동시장의 성차별적 구조에 더해 임금 노동과 가사 노동을 모두 수행해야 하는 현대 여성의 이중부담은 100년 전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지금 우리가 《신여성》을 읽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신여성은 남성의 응시와 관찰에 의해 서술되는 존재였으며, 《신여성》의 남성 필진은 “객관성을 가장한 주관성”을 내보인다. 《신여성》의 필자 ‘은파리’는 미행 형식을 통해 여성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며 비판하는 서술 방식을 취하지만, 그의 상상과 해석은 오히려 주관적 인식을 더 드러낼 뿐이다. 이는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무력화된 식민지 남성이 주체성을 회복하고자 여성을 타자화하고 관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또한 《신여성》은 세태를 풍자하는 사전이나 ‘여학생의 아홉 가지 잘못’ 따위의 십계명을 게재해 ‘상징폭력’의 형태로 여성을 계몽하고자 했다. 남성 필진은 여학생을 순진하고 미숙한 존재로 상정해 교복과 남녀 관계를 단속했으며, 신여성에게도 보호의 논리를 들어 극장 개장 시간을 제한하거나 선정적 장면을 검열하는 등의 형태로 대중문화 향유를 일부 제한했다.


  근대잡지 《신여성》은 남성이 여성의 모습을 규정해 온 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신여성은 남성들의 눈초리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문화를 향유하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신여성》이 여성을 남성의 시선으로 규정해 온 역사이면서도 동시에 여성 스스로 주체성을 얻고자 분투해 온 기록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여성》의 여성 기자로 일한 송계월은 남성이 여성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성이 스스로 자신을 재현하고, 나아가 여성이 남성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여성 주도의 좌담을 기획하기도 했다. 반복되는 듯한 성차별과 여성혐오, 여성의 이중부담 속에서 우리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 신여성들의 존재를 기억해야 한다. 이제 ‘우리 몫의 책임’*을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이 남겨진 과제다.


*조형근,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한겨레출판, 2024)


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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