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다짐에서 연루의 다짐으로 나아가기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이태원 참사를 다시 겪어야 했으며, 고 김용균 씨의 산재 사고 이후에도 노동자들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일터에서 스러져 간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음에도 젠더 폭력은 끊이지 않는다. 반복되는 비극 앞에서 ‘잊지 않겠다’는 말만이 공허하게 남는다. 우리 사회는 대체 무엇을 기억해 온 것인가? 혹은 누가 그 기억을 소홀히 다루었는가? 역사 속 비극을 단순히 잊지 않고 기억하는 행위만으로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어려운 듯하다. 역사적 사건이 결코 내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느끼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때 비로소 그 기억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도 모른다.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는 근현대 시기의 식민지 조선을 비롯해 제국주의 일본과 당시 서구 사회의 여러 개인이 국가나 민족의 경계를 넘어 관계 맺은 방식을 보여주며 넓은 시각으로 역사를 조망한다. 거대 담론으로서의 역사만을 보여주기보다 그 속의 다양한 개인을 조명하는 저자의 서술 방식은 국가 내에서 다양한 개인의 경험이 항상 국가나 민족 단위로 묶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다. 책에서 식민지 조선과 관계된 타국의 개인들이 조명되는 모습을 통해 독자는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어 온 방식이 결코 단선적이지 않으며, 역사 속에서 누구든 완전한 피해자나 가해자로서만 존재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타자의 입장에 ‘연루’되는 역사 인식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초반부에 제시된 식민지 조선과 일본 제국주의 속 여러 개인을 다룬 부분에서 피해·가해 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조선이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였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에 소속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의 포로였던 연합군 병사에게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이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일본군 포로였던 알리스터 어쿼트의 회고록 《잊힌 하이랜더 부대원》에는 그가 태국과 버마(미얀마)를 잇는 콰이강의 다리 공사에 동원되었을 때 겪은 조선인 포로감시원의 폭력 행위가 서술되었다. 포로감시원은 주로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동원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폭력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동시에 이 폭력 뒤에는 물자 부족과 폭력적인 일본군의 포로 대우 관습, 상명하복 문화라는 맥락이 존재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들은 완전한 피해자로도, 가해자로도 분류될 수 없는 것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 역시 피해와 가해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저자는 사회진화론을 주창한 잭 런던의 동양인 혐오를 소개하며, 이 혐오가 최근 한국에서 다른 나라를 얕보는 형태로 재연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피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가 되는 순간이다. 전쟁 시기 여성에 대한 인식도 비교적 최근까지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풋라이트 익스프레스〉에 등장한 동양 직업여성 캐릭터 ‘상하이 릴’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약소국의 여성은 국가에 의해 자행된 성착취 제도의 희생자가 되어야 했으며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성적으로 대상화되었다. 국가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 문제임에도 자국 남성들은 이들을 동정하거나 수치스러운 존재로 바라봤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에는 분노하면서, 정작 미군과 한국 정부에 의해 자행된 기지촌 미군 ‘위안부’ 문제는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우리나라 역시 전쟁 시기 성매매에 적극 가담했다는 책임에서 그다지 자유롭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외에 파리코뮌 현장에서 활동한 조선인의 사례, 영화사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나 나치에 가담했다는 비판을 받는 레니 리펜슈탈, 평범한 ‘작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역사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 독일인 등 서구의 이야기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 이어지는 역사와 역사의 가해자로서 인식해야 할 책임을 보여주며 독자로 하여금 역사 앞에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를 자문하게 한다.
베트남 출신 미국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은 뮤지컬 <미스 사이공>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보인 부도덕성을 숨겼음을 지적하며 “세계가 기억의 예술을 어떻게 형성하고 다시 그것이 어떻게 세계를 형성하는지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로 기능했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는 세계가 나아갈 방향성을 좌우하는 문제로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역사와 더 넓고 깊게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피해를 애도하면서도 가해 사실에 눈 감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한 나라 안에서 같은 역사를 겪었더라도 젠더나 계급 정체성에 따라 그 경험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역사 속 인물과의 연루를 통해 배웠다. 이 책으로 역사 속 인물들과 관계되며 ‘연루됨의 윤리’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면 수많은 타자의 입장에 서 보며 반복되듯 이어지는 사회 속에서 져야 할 ‘내 몫의 책임’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