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를 이어갈 때 무리한 부탁에도 마지못해 응할 때가 종종 있다. 가능한 한 갈등을 만들지 않고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서, 혹은 폐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키지 않았지만 관계를 지켰으니 된 거라며 나의 감정을 억누르기도 했던 것 같다. 이 민폐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은 막 시작하려는 관계의 불씨를 꺼뜨리기도 한다. 더 친해지고 싶어도 상대에게 부담을 줄 것이란 걱정에 사소한 부탁도 꺼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 억지로 관계를 지켰든 지레 겁먹고 도망쳤든, 나의 욕구는 뒷전이고 타인의 욕구만 우선이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다. 《성격 좋다는 말에 가려진 것들》은 독자에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자신을 사회와 타인의 기준에 끼워 맞추고 있진 않은지를 묻는다. 나의 감정과 욕구를 무시하고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관계에서 벗어나 자신을 먼저 마주하면 나를 잃지 않고도 타인을 이해하고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흔히 관계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때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누군가의 딸이나 엄마, 혹은 부하 직원으로서 응당 해내야 할 일이 있다는 ‘당위’가 감정보다 더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사회와 타인의 기준에 맞추려는 ‘사회부과 완벽주의’가 심화하는 최근의 경향으로 볼 때 여러 역할의 기대를 동시에 받는 이들에게 이 당위의 압박은 더 무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당위에 휘둘려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감정 뒤에 숨겨진 나의 욕구를 무시하기 십상이라고 말한다. 특히 슬픔이나 외로움, 분노와 같은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할 때 비로소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발견하고 나를 돌볼 수 있다. 평소 자신의 감정을 참아내는 데 급급했다면, “내 감각에 충분히 튜닝한 뒤에 감정을 조절해도 늦지 않”다는 저자의 조언과 함께 그가 제시한 ‘지시적 마음챙김’, ‘일상 활동 모니터링’, ‘감정 지도’와 같은 방법을 눈여겨볼 수 있을 테다.
나의 감정을 마주했다면 타고난 기질을 살펴보며 ‘참자기’를 탐구하고 자신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차례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에게는 본래 자신의 기질과 맞지 않는 ‘거짓자기’에 잠식된 모습이 나타난다. 저자는 이 역시 사회와 타인의 기대가 강요된 결과라는 점을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자기주장이 강하고 까탈스러운 성격보다 순하고 무던한 성격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지만, 사실 ‘좋은 성격’도 단지 사회의 기대가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애초 한 사람의 성격은 상황에 따라 강점이 될 수도, 약점이 될 수도 있기에 “가능성의 영역”에 존재한다. 각자의 고유한 기질과 참자기가 좋거나 나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다. 한편, 거짓자기는 참자기의 페르소나가 되기도 하며, 우리는 상황에 따라 참자기와 거짓자기를 선택할 수 있다. 문제는 거짓자기가 참자기를 완전히 대체할 정도로 커지면 자신의 본모습도 받아들이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함께 제시된 ‘자기개념’과 ‘레퍼토리’ 개념은 독자가 자신의 본모습을 결코 단편적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참자기를 유연하게 탐구하도록 돕는다. ‘비폭력대화’와 ‘심리적 경계’ 지키기 등 나의 고유함을 잃지 않으며 관계 맺기 위한 도구도 함께 소개됐다.
이 책의 특별한 점은 정지우 작가가 추천사에서 언급했듯 심리학자인 저자가 내담자가 아닌 자신의 트라우마 경험을 직접 고백하며 그로부터 회복한 과정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독자가 자기 고유의 성향을 긍정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주제 의식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한겨레출판, 2023)와의 차이도 바로 이 부분에서 나타난다.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가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여러 사람들의 상담 사례를 간략히 소개한다면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트라우마 경험을 직접 서술해 독자가 트라우마 당사자의 상황과 고통에 깊이 공감할 수 있으며 트라우마가 초래한 행동이나 감정 반응, 트라우마 회복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저자는 자신이 겪은 ‘투사’, ‘반추’, ‘스키마’로 인한 희생 등의 경험을 설명하며 자신의 욕구와 감정 이해를 넘어 트라우마의 원인이 된 타인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납득하게 된 과정을 보여준다. 이 ‘외상 후 성장’은 자신에게 자비를 베푸는 형태로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연대할 가능성도 만들어 준다. 자신의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해 본 사람은 타인의 슬픔을 진지하게 대할 줄 알며, 타인의 취약함과 불완전함에도 손 내밀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타인의 취약성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민폐’ 끼칠 용기를 얻는다. 상대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거절을 두려워하며, 그 이면에 수용 받고 싶은 욕구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은 상대와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 볼 수 있다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약한 존재들이기에 서로 의존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지지망으로 얻는 유대감,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며 상처를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연결의 필요성을 증명한다. 사회가 바라는 완벽의 기준을 내려놓고 불완전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타인의 취약함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타인과 나 사이의 경계를 애써 허물고 서로의 진심에 정향하며 공명하는 우리를 그려 본다.
한겨레출판으로부터 도서를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