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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의 책다락
  • 해피 엔드
  • 이주란
  • 12,600원 (10%700)
  • 2023-10-30
  • : 487



나이가 들어도 관계를 정리하는 일은 어렵다. 아니, 나이가 들수록 관계를 정리하는 일은 어렵다. 어릴 때처럼 학교나 직장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기회가 드물기에, 주변에 남은 사람들로부터 작은 흠이나 큰 허물이 보여도 안 본 것처럼, 안 보이는 것처럼 지내는 것이 나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리될 관계는 정리되는 것이 인간사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기에,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관계는 큰맘 먹고 정리하는 것이 마땅한 경우도 있다. 이주란의 소설 <해피 엔드>의 주인공 '기주'의 상황이 그렇다.


기주에게는 안 본 지 2년 6개월이 된 친구 '원경'이 있다. 공개적으로 다투고 공식적으로 절교한 사이이기 때문에 더 이상 '친구'라고 부를 수 없는 관계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기주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다. 기주와 원경을 모두 아는 친구들은 두 사람이 별것도 아닌 일로 멀어졌다고, 이제 그만 화해하고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라고 말하지만, 원경은 몰라도 기주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기주에게 원경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공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친구였고, 그렇기 때문에 원경이 과거에 한 어떤 말이나 행동이 기주에게는 치명적인 배신처럼 느껴진 탓이다.


소설은 기주가 원경에게서 오랜만에 메시지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원경과 소식을 끊은 후 집과 직장을 오가며 조용히 살고 있던 기주는, 겉으로 뚜렷하게 내색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심한 요동을 느낀다. 제주에서 서울로 장례식에 참석하러 온 애인과 문자로 대화하고, 집 앞 편의점 사장과 담소하고, 돌아가신 윗집 할아버지를 추모하고, 직장 사람들과 별것 아닌 일로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머릿속 한구석에선 원경에 대해 생각한다. 생각하다, 결국 용기를 내어 회사 동료인 장과장과 함께 원경이 운영하는 카페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기주는 뜻밖의 만남을 가진다.


(스포일러 주의!!) 기주는 원경을 만나기 위해 원경의 카페로 찾아갔지만, 공교롭게도 원경이 부재중이라 원경과 만나지 못한다. 그 대신 원경의 어머니와 동생, 조카를 만나는데, 이들은 원경의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한 기주에게 무조건적인 친절을 베푼다. 원경과 다투고 2년 반이나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모른 채 그저 원경의 친구라는 이유로 자신을 다정하게 대하는 이들을 보면서 기주는 마음의 변화를 느낀다. 어쩌면 자신이 원경에게 (멋대로) 너무 큰 기대를 했고, 그 기대를 무너뜨렸다는 이유로 (멋대로) 원경을 너무 오래 미워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된다.


나는 왜 그토록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 했을까. 기쁨이나 슬픔은 그렇지 않은데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 오래되고 깊은 마음들은 왜 꼭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했는지 잘 모르겠다. (153쪽)


기대가 클수록 관계에 대한 실망감은 커진다는 것은, 친구 관계뿐 아니라 다른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 부모니까, 자식이니까, 애인이니까, 배우자니까 이렇게 해야지, 이 정도는 해줘야지, 라는 기대가 눈 앞에 있는 사람의 실체를 못 보게 만들고 진심을 가리고 관계를 망친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 기주는 원경과의 관계만 문제인 것이 아니라 다른 관계에도 문제가 있다. 가난하고 불우했던 원가족과 이별하고 혼자서 자유롭게 살라는 어머니의 말에, 다른 사람이라면 홀가분함을 느낄 법도 한데, 기주는 어떻게 엄마가 되어서 딸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서운함을 느낀다. 남자친구가 제주에 살아서 자주 못 보는 것에도 불만이 있지만, 여자친구로서 남자친구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 체념한다. 


그렇게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남은 마음들은 (어머니나 남자친구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는 방식으로 해소된다. 돌아가신 윗집 할아버지의 빈 집을 챙기고, 혼자서 매대를 지키는 편의점 사장님의 안부를 걱정하고, 남친 선물로 산 반바지를 직장 동료에게 건네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라도 애정이 순환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편한 관계를 정리하면 그렇지 않은 관계에 나누어줄 애정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면 역시 정리할 필요가 있는 관계는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 같지만, 기주가 원경과의 일 때문에 알게 된 것들이나 만나게 된 인연들을 생각하면 어느 관계에나 그 나름의 효용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관계,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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