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 마음을 울린다.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첫 구절. 사람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은 마지막 구절.
'간단후쿠를 입고, 나는 간단후쿠가 된다.' (7쪽)
'답장은 마세요.'(288쪽)
<간단후쿠 : 일본군 위안소에서 '위안부'들이 주로 입은 간단한 원피스식의 옷)
'군인을 데리고 자는 공장'이라는 부분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스즈랑은 바늘 공장이다.
스즈랑은 실 공장이다.
스즈랑은 비단 공장이다.
스즈랑은 신발 공장이다.
스즈랑은 군복 만드는 공장이다.
스즈랑은 돈 많이 버는 공장이다.
스즈랑은 좋은 공장이다.
스즈랑은 간호사 양성소다. (58쪽)
소설을 이끌어가는 요코 (개나리)가 끌려간 곳이 '스즈랑'이다. 그런데, 이 스즈랑에 오기까지 많은 이들은 공장에 가는 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속였다. 어떻게 보면 '스즈랑은~이다'라는 말은 사실이다. 그곳에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곳으로 가는 줄 알았으니까.
그러나 '스즈랑은 ~이다'는 거짓이다. 속임수다. 인신매매를 하기 위한 술수다. 이것은 거짓을 넘어 범죄다.
범죄에 속아 넘어간 사람을 비난하는 일은 없다. 범죄자를 비난하고, 그를 처벌해야지 피해자를 비난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넘기는 일은 없다.
또한 부끄러워해야 할 존재는 범죄자이지 피해자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은? 이들은 여전히 거짓을 말한다. 여러 증거가 있음에도 그들은 '스즈랑은 ~이다'라는 말을 하고, 그곳으로 자발적으로 왔다고, 즉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왔다고 우긴다.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속임수로 사람을 끌고 갔음에도,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하지도 않았으면서 자신들은 정당하다고 말한다. 이는 범죄를 감추려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우기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다.
이런 행위를 하는 자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자신들의 범죄를 이토록 가리고 없는 것으로 하려는 자들을,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자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소설은 그러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스즈랑은 ~이다'에 속아 온 주인공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갈 뿐이다. 그곳에 온 사람들. 모두가 '스즈랑은 ~이다'에 속아 온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 영문도 모른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책임을 묻지 않아도 소설을 읽으면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 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안다. 다만 그 책임을 지우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버티고 있는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서글픈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젠 생존자가 몇 분 남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버티기만 하는 일본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소녀상을 세워도 일본 눈치를 보는 사람들. 거기서 더 나아가 이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외치는 상황.
마지막 구절, '답장은 마세요.'란 말을 응답하지 말라는 말로 받아들였는지, 원. 아니다. 인간의 존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답장은 마세요.'라고 하는 것.
이 말에 담겨 있는 의미를 마음에 새기면 어찌 응답을 안 할 수가 있나? 어떻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있나?
소설은 담담하게 전개되지만, 이 담담한 전개는 비극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토록 슬픈 현실, 우리 아픈 역사.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소설은 '요코'의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러니 첫 문장은 사람의 존엄을 잃은, 옷(간단후쿠)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군들은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기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 또한 돈을 벌 목적으로 사람들을 이용한 자들이 있을 뿐. 하지만 이들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다.
나나코가 죽은 다음에 눈이 먼 하나코를 위해 모두가 나나코가 되어주는 모습을 통해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 애처롭다. 그러니 요코가 '답장은 마세요.'라고 했지만, 우리는 이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한 응답을 작가 김숨이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이 지속적인 응답에 우리 역시 반응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 비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