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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습기 다이어트
  • 김청귤
  • 11,700원 (10%650)
  • 2024-01-10
  • : 415



누가 나한테 이렇게 살을 빼주겠다고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이렇게 고민이 되었던 적이 또 있던가? 방 안에 제습기를 틀고 잠이 들었는데, 몇 시간 후 잠에서 깨어나서 보니 몸을 무겁게 했던 살들이 다 없어졌다면? 선아의 엄마는 제습기를 사고 만족감이 가득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분이 어디에 숨어 있던 건지, 제습기 좀 틀고 나면 통에 물이 가득 찬 것을 보고 신기했다. 그러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집 안 구석구석 숨은 습기가 제습기 가동과 동시에 붙잡혀서 끌려 나오는 듯했다. 어느 날 자기 방에 누워있던 선아는, 엄마가 방에 틀어놓은 제습기를 무시하고 잠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없는 곳에 틀어놓곤 하는 제습기. 옷장의 문을 모두 열어놓고, 침대 위의 이불도 뽀송해지기를 바라면서 제습기를 틀어놓고 방문을 닫는다. 보통은 외출할 일이 있을 때 틀어놓고 나가서, 집에 들어오면 제습기를 끄는 루틴이었다. 집에 들어와서 제습기를 끄고 물통을 확인하면, 내가 봐도 신기하긴 하다. 집안의 공기가 꿉꿉한 느낌이 들 때도 있고, 특히 장마철이나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곤 하는 때에 제습기를 틀어놓을 때가 많은데, 손에 잡히지 않는 습기가 제습기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간다는 게 신기하지 않은가? 에어컨으로 공기를 시원하게 하고, 히터로 실내를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도 비슷한 방식이겠지만, 반대로 공기 중의 습기를 잡아다가 작은 기계 안의 물통에 모을 수 있다니.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세상이 점점 좋아져.


암튼, 제습기의 용도는 그런 것인데, 그 사용 후기가 이상하게 들려오기도 한다. 엄마가 선아의 방에 제습기를 틀어놓으면서 농담처럼 했던 그 말이 사실이 되고 나니 세상의 모든 것이 달라진 것만 같다. 엄마가 “혹시 우리 딸 미라 되면 어떻게 해!”라며 웃고 나갔는데, 그게 기적인지 저주인지 모를 결과를 낳고 말았다. 잠에서 깬 선아의 외모가 변했다. 고3 수험생으로 살면서 찐 살이 불편했던 선아였다.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시도조차 하지 않고 살았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마른 몸으로 변해 있었다. 얼굴의 턱선이 그대로 살아 있고, 코는 오뚝해졌다. 목 아래의 쇄골은 도드라졌고, 눈은 평소보다 훨씬 커 보였다. 통통해서 치수를 늘려 신었던 발은 말라 있었다. 온몸의 수분이 사라진 것처럼 건조했다. 몸은 움직이고 있지만 심장은 뛰지 않았고, 추위나 더위도 느끼지 못했다. 손에 물이 닿아도 젖지 않았다. 음식 냄새가 코를 찔러도 먹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물조차도 목으로 넘길 수 없는, 미라가 되어버린 거다.


미라가 되었어도 보기 싫게 마른 게 아니었다. 예뻤다. 곧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살이 빠질 줄은 몰랐다. 제습기가 내 모든 수분을 빨아들인 것처럼 온몸이 건조했다. 내가 살아 있는 게 맞는지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심장박동을 느껴봤다. 그러나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10페이지)


제습기로 다이어트를 하고 마른 몸의 ‘미라’가 되는 것이 붐처럼 일어난 세상이었다. 그런데 이 방식이 좀 이상한 게, 제습기 틀어놓고 잔다고 모두 미라가 되는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복불복. 누구는 미라가 되길 바라면서 제습기 틀어놓고 자도 몸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서 투덜거렸다. 누구는 우연처럼 미라가 되고 나니 인기인이 되어 있었다. 인플루언서나 모델로 일할 수도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좋은 건가? 지긋지긋한 살들이 내 몸을 떠나니 홀가분하고 기분 좋을까? 선아의 엄마는 갑자기 날씬(?)해진 딸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같이 쇼핑하러 다니고, 옷 가게 직원이 아끼지 않은 선아 몸매의 칭찬에 행복하다. 누구는 돈 들여 시간 들여 살을 빼려고 해도 안 되는데, 이건 뭐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선택받은 몸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선아도 처음에는 당황하고 어색했는데, 점점 자기 몸이 예쁘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 된 자기 몸이 불편해진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우울했다. 늘 그 ‘적당히’가 되지 않아서 살이 찌거나 마르거나 하는 게 내 몸이었다. 솔직히 적당히 마른 적은 있어도 보기 싫게 마른 적은 없다. 그마저도 기억이 가물거리는 예전의 일이다. 이 소설의 부재처럼, 나는 지금 ‘Free 사이즈, 내 것이 절대 될 수 없었던’ 시간을 살고 있다. 어느 순간 플러스 사이즈 쇼핑몰을 기웃거리고 있다. 이렇게 예쁜 옷들이 이렇게 큰 사이즈도 만들어지고 있다는 게 신기한 경험이었다. 내 몸의 수분으로 내 몸무게가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내 몸의 수분을 모두 날려 보내고 선아처럼 마른 몸이 되면 좋은 건지 잠깐 고민도 했지만, 역시 아직 나는 마른 몸이 아니라 내가 행복한 몸으로 살고 싶은 바람이 더 크다. 마른 몸의 선아를 예쁘다고 하면서 부러움과 질투를 동시에 보내는 시선에 간절해지지 않는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기분 좋아지고, 이 음식을 함께 먹는 사람들과의 시간도 즐겁다. 코를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를 맡고 있으면서도 정작 물 한 모금도 목으로 넘기지 못하는 미라의 삶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뚱뚱하다가 미라가 된 선아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타인의 시선이 무서웠다. 살이 찌면 쪘다고, 마른 몸이 되니까 좀비 같다면서 뒷담화하고 비꼬는 말이 들려올 때마다 가슴 속에서 뭔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잃어버린 그 ‘뭔가’를 찾아와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가 선아가 찾아낸 씨앗, 싹을 틔우고 묘목으로 성장한 이야기에 희망에 찬다. 생각의 방향을 바꾸니 금방 또 기분이 좋아지면서, 부드럽게 내리는 봄비에 활짝 피어날 꽃을 상상하며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읽는 동안 우울했던 내 마음은, 다 읽고 나서는 행복해졌다. 수분을 머금은 선아의 몸에 다시 생기가 도는 것이 눈앞에서 그려지고 있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던 맨발에 닿는 느낌이 축축하고 따뜻했다. 그동안 튕겨 나가기만 했었는데 피부 위에 떨어진 빗방울들이 쏙쏙 흡수되는 게 보였다. 한 걸음 걸어가 나무 바로 아래 서서 고개를 들었다. 봄이라서 그런지 빗방울도 따뜻했다. 물기에 젖은 라일락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내 안에서도 꽃이 퐁퐁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라일락을 보며 예쁘다고 감탄하고 눈을 감고 향기를 맡으며 행복해했다. 내가 지금 행복하듯이. (6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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