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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혈님의 서재
  • 세 번째 뇌
  • 장 미셸 우구를리앙
  • 14,400원 (10%800)
  • 2020-11-20
  • : 222

근대 이래 인간은 자유의지로 운명을 개척하며, 이성과 논리에 의해 자신의 내면과 외계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자신의 존엄 근거를 찾았습니다. 우수한 정신의 징표는 창의력이며, 남의 것을 따라하는 습관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정신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여겨져 배척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창의적인 활동이나 그 결과물 역시 알고 보면 보잘것없는 흉내내기의 파생물이라면? 한편으로 실망스럽고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설령 좀 실망이 되더라도, 이것이 엄연히 우리의 정신이 작동하는 방식이라면 객관적인 현실, 팩트를 받아들이고 새로이 어떤 의의를 모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인지의 뇌와 감정의 뇌가 있고, 각각 논리와 이성, 감성과 상상의 영역을 담당한다는 건 이제 일반인들도 당연한 상식으로 여겨 받아들입니다. 여기에 "세번째 뇌 기능"을 추가하여, 어떤 학습이나 반응에도 일단은 "모방"의 기능이 먼저 작동함을 밝혀낸 건 이 책 저자 우그를리앙, 또 다른 두 연구자들인 르네 지라르, 기 르포르 등 천재 신경학자들의 뛰어난 업적이며 이 성과는 큰 시야에서는 비교적 최근이라 할 1980년대 초 이후 그 큰 줄기가 이뤄졌습니다.

저자는 흥미롭게도 훨씬 선배라 부를 만한 라캉의 저서를 인용하여, 이미 1932년에 "... 감정, 판단력,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정신장애는 모두 정신의 총합에 일어나는 특수한 장애다"(p41에서 재인용)라고 표명한 그의 문장에 주목합니다. 물론 라캉은 아주 예전 분이므로, 1980년대 이후에야 이론적, 과학적으로 규명된 "세번째 뇌" 이론을 반 세기나 앞서 개척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저자 우그를리앙이 라캉의 그 문장을 그리 해석했다는 뜻입니다. 저 문장 중 "행동"이 아마도 자신과 동료들이 밝혀낸 "세번째 뇌"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변연계"의 존재는 밝혀진 지가 꽤 오래되었고, 당시만 해도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입장도 꽤 목소리가 컸습니다. 그러나 뇌의 이 부위야말로 감정과 충동 등을 관장하며, 인간의 많은 행동을 결정하는 충동 같은 것의 원천이 됩니다. 지능과 이성의 원천인 대뇌 신피질의 성능이 압도적으로 발달하여 이런 충동을 일일이 관장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감정이 퇴화한 채 오로지 기계적인 계산만으로 정신이 작동한다면 (예상과는 달리) 그런 사람은 좋은 성과를 내지도 못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서 동기를 따로 얻어야만 엄청난 활력을 따로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시인이 베아트리체 같은 운명의 미인(p55)을 만나야 신선한 영감을 비로소 얻고 훌륭한 작품을 생산하는 것과 같죠.

제1의 뇌가 대뇌피질, 제2의 뇌가 변연계라면, 이 책 저자와 선구자적인 동료 연구자들이 규명해 낸 세번째 뇌는 어디에 (물리적으로) 위치해 있을까요? "세번째 뇌"라는 말은 다분히 비유적, 혹은 인문적입니다만 신경학적으로는 거울 뉴런을 가리킵니다. 이 뉴런은 뇌의 곳곳에 분포할 뿐 어떤 분리된 영역을 차지하지는 않지 않느냐? 맞습니다. 거울 뉴런은 제1, 제2 뇌에 고루 퍼져 있습니다. 그래도 저자는 이 뉴런에 대고 "세번째 뇌"의 지위를 부여하기에 충부하다고 말합니다. 거울 뉴런이 수행하는 "모방"이야말로, 세밀한 계산은 물론 타인의 감정을 흉내내어 자신만의 자아를 형성하는 가장 기초되는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아를 형성하며, 저 자아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이에 어떤 물리적인 위협이 가해지지도 않지만, 자신의 자존이 침해되었다고 여길 때 불 같이 화를 내며 때로 목숨까지 걸고 싸웁니다. 이 자아는 생래적으로 우리 정신에 떡하니 장착된 게 아니라, 자라면서 꾸준히 형성됩니다. 때로 이 자아는 강렬한 체험을 통해 크게 바뀌기도 합니다. 지인 중 누군가가 어떤 심각한 경험을 한 뒤 "사람이 바뀌었다"고 느껴지는 때가 여러 번 있었을 겁니다. 대부분은 정신적인 체험이지만(친지의 사별, 실연, 사업 실패로 인한 낙담, 해고 등의 좌절), 이 책에 나오는 대로 뇌의 특정 부분에 물리적으로 큰 상처를 입고 자아의 성격 자체가 바뀌어버린 극적인 예(p35)도 있습니다. 이런 예가 드문 건, 보통 뇌에 그 정도 상처가 나면 생명 자체가 위태롭거나 아예 온전한 정신 유지가 어려워지며, 용케도 자아의 개성 관장 부위만 surgical하게 다친다는 자체가 극히 어렵기 때문이겠죠.

다른 것도 아니고 정체성의 형성, 가치관의 채택, 이런 것이 고작 타인에의 모방을 통해 이뤄진다고 하면, 정신에의 자부심이 강한 우리 인간으로서는 뭔가 김 새는 결과임이 틀림 없습니다. 만약에 계산 능력, 정보의 취합 정리 능력, 기억력, 연결 연상 능력 등이 탁월한 사람(학창 시절 공부깨나 한 소위 수재급)이라면, 이 역시 결국은 크고작은 롤모델을 보고 따라하며 형성된 지적 능력이라는 결론 앞에 적잖게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아주 효율적이면서도 본능적이고, 생존을 위해 가장 먼저 작동하는 이 거울 뉴런이야말로 두 뇌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부위라고 주장합니다. 첫째 둘째 뇌가 아무리 발달해도 세번째가 원활히 작동 못 하면 결국 퍼포먼스가 잘 안 난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아니, 애초에 세번째 뇌가 나면서부터, 혹은 성장과정에서 부진했다면 첫째 둘째 뇌도 올바르게 발달 못했을 겁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죠. "뭘 보고 배웠겠냐?"

모방은 학습과 감정 발동의 보조가 아니라 중추에 가깝습니다. 뇌가 이런 식으로 진화하여 얻는 유리한 점이 뭐겠습니까? 자아의 형성이건, 연산 기제의 발동이건, 혹은 감정의 발현이든 간에, 이 모방 뉴런의 활발한 작동 덕에 이것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끊임 없이 변화한다는 겁니다. 자연계는 끊임 없이 변화하고, 생존이 걸린 과제를 계속 던져 줍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캐치하고, 되도록이면 빨리 적응하여 우리의 물리적 생명을 유지해야 합니다.

분석과 연구 도출 과정은 힘들고 오래 걸리며 보통의 지능을 갖고 태어난 이들은 아예 일정 벽을 넘기도 어렵습니다(아인슈타인 정도나 되는 천재라야 넥스트 레벨 도약이 가능하죠). 생존을 위한 방법의 가장 빠른 모색은, 잘 되는 걸 보고, 혹은 보고 배울 만한 걸 포착하고 따라하는 길을 통해 가능합니다. 창조보다 훨씬 쉽고 경제적이기까지 한 게 "따라하기"입니다. 우리가 무슨 천재도 아니고 어떻게 일일이 뭘 만들어내고 깨달아가며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겠습니까. 거울 뉴런이 아니었으면 인간(뿐 아니라 상당수 생명체)은 일찌감치 멸종했을 겁니다.

"동물은 길들여지면 인간화된다(p156)." 우리는 반려묘, 반려견 등을 길들이며 그들이 감정도 때로 표시하고 주인(우리)에게 공감하거나 혹은 공감하려 애 쓰는 걸 보고 무척 신기해합니다. 기실 이는 "인간화"가 아니라, 뇌를 가진 이상 동물들도 그 안에 분포한 뉴런을 통해, 자신들의 생존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인간을 보고 가능한 범위에서 따라하는 겁니다.

루소는 분명 천재였습니다. 도덕적으로는 아주 결함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분명 그의 두뇌가 작동하는 방식은 평범한 사람들의 성과를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때문에 (설령 타고난 일정 수위의 사회성을 충분히 갖추었어도) 자신의 수월성을 오염시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사회성을 떨어뜨립니다. 저자가 지적하듯, 욕망과 욕구의 의도적 혼동은 그의 지론인 "자연상태"를 철저히 관철시키지 위한 목적이었을 겁니다. 반면 모방이라는 본질적 특성을 흔쾌히 인정하는 저자와 같은 입장이라면 인간만큼 철저히 사회적인 동물도 없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게 세번째 뇌, 즉 거울 뉴런이라는 본체적 부위인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자가 비판하는) 루소와 같은 입장은, "자연상태"를 망치는 퇴행적이고 불순한 작용으로 모방을 파악하는 거죠.

사람의 뇌는 분명 매우 복잡한 진화 단계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뇌, 아니 우리의 정신은 분명 갈등을 겪습니다.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종족 번식의 욕구를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본능이나,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무분별한 발동에 나선다면 이 개체는 일탈자의 낙인이 찍혀 사회로부터 축출됩니다. 이런 다층적인 욕구와 이성의 갈등이 분명 존재하기에, 미숙한 사람은 여러 분리된 "목소리"를 두고 그 중 일부는 자신이 아닌 어떤 초월적 존재의 명령처럼 착각합니다. 이런 걸 놓고 저자는 조현병 환자의 특징(p165)으로 규정합니다.전혀 깜냥이 아닌 사람이 어디서 갑자기 배운(모방한) 특정 신조를 장엄한 어조로 되뇌며 마치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 양 우쭐대는 게 바로 이런 패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욕구와 이성의 갈등을 원만히 조절하고 내면에서 적절히 삭이는 게 인격자의 특징이며, 이런 조절이 언제라도 또 어떤 경우에나 가능하다면 그런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입니다.

반대로 성도착자의 많은 경우는 불건전한 권력욕 따위가 성의 기제에 개입한 경우입니다. 권력욕은 대체로 타인을 철저히 객체화하여 자신의 의지만을 타인에게 관철시키는 쪽으로 발현됩니다. 거짓말을 일삼고, 타인에 거짓으로 공감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공감해 준 대가를 받아내려 듭니다. 선동가와 위선자, 혹은 이른바 "관종"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게, 공감이 배제된 채 시도하는 타인에의 지배(p179)입니다.

크게 깨달은 성자(saint)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욕망, 때로 주인인 자신을 집어삼킬 수 있는 욕망의 "타자성을 인식(p261)"하되 이를 자유자재로 행하는 것입니다. 앞부분에 나온 조루, 불감증(p200)등의 함정에 빠지면 이는 이것대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순전히 의식적인 기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조 아무개 등 성범죄자의 대척점이라 할 수 있죠). 때로는 욕망을 폭발적으로 드러내고(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방법으로), 때로는 철저히 조절함으로써 조화와 공리(功利)를 달성합니다. 왜 욕망은 타자성을 가질 뿐입니까? 결국 이 욕망이라는 것도 거울 뉴런의 작동에 의해 알게모르게 나의 내면에 스며든, "타자의 그 무멋"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욕망이 "진짜 나"를 배신하면, 이번에는 예수나 부처나 공자 등의 성인이 모범을 보였던 방식을 잽싸게 모방하여 우리는 욕망을 길들이면 그만일 뿐, 얘한테 굴복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뇌신경학 이론에 대한 해설서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인문 담론의 인용과 전개가 풍부하며, 군데군데 실용적 교훈마저 나오는데 최고 권위의 신경학자가 드는 근거며 설득이라서 더 머리에 잘 남습니다. 기왕 뭘 모방하려면 이런 책을 읽고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가 펼치는 사고 체계와 결론을 모방하는 게^^, 근사한 지식도 쌓고 내 마음의 진정한 평온도 달성하는 지름길이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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