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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충좌돌

대학생인 나는 좀 어리숙했고 지금처럼 성격이 불같았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만 속이 풀리는 나는, 그런 면에서 단체 생활에 최악이었다. 조금 더 솔직했다면, 힘들 때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용기가 있었다면, 속상하고 질투 나고 친해지고 싶고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다는 걸 말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런 걸 못한다. 아니, 그때는 안 하는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못하는 거였다. 좋아하는 게 많아서 감정적인 면으로는 누구보다 솔직하고 풍성한 줄 알았는데, 좋아하는 게 많은 것과 표현하는 건 좀 다른가? 그래, 다를 수도 있겠다. 좋아하는 게 많은 건 그저 내 안에 담아두고 쌓아두고 간직하면 되지만 표현하는 건 꺼내야 하니까. 꺼내어 주는 걸, 어릴 때부터 못했던 것 같다.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될 거라고 믿었지만 이십 대의 나는 만남보다 많은 이별을 했고, 누구의 잘못도 없는 다툼을 했으며 그렇게 원망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들었다.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할걸. 이 생각을 대학교 졸업할 즈음에 했다. 괜찮냐는 말들에 그냥 괜찮다 하고 다녔는데, 내가 힘들다고 말해봤자 저들이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마음의 짐만 얹는 꼴이니 그냥 괜찮다고 하고 다녔는데 그러지 말 걸 그랬다. 힘든 걸 나눌 순 없지만 나의 힘듦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힘들지 않도록 바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이제 와 다시 말하자면, 정말 힘들었어요.
물론 이건 후회다. 안다. 돌아가도 나는 못할 거다. 지금도 잘 못하니까. 그러니까 이 부분은 너무 깊게 후회 말자.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고, 지금도 그러는 걸, 뭐.
섬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리운 이름을 마음껏 소리 내어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 전 애인, 그, 내가 만났던 사람처럼3인칭으로 에둘러 말하는 게 아니라 서서히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을 꾹꾹 눌러 부르는 것.5년 전, 스물셋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느린 섬으로 도망쳤던 걸까. 그때는 막연히 나를 아는 이도, 그를 아는 이도 없는 곳에 가서 그 이름을 실컷 부르고 오려고 했다. 날이 좋으면 바다 건너 제주가 보이는 범바위 위에서,200년 된 소나무가 있는 지리해수욕장에서, 영화 〈서편제〉에서 유봉과 송화 그리고 동호 이렇게 세 사람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던 돌담길에서도 나는 지독하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날 이후, 누군가 그리운 날이면 섬 하나를 떠올리게 되었고, 더는 내 마음을 아무렇게나 팽개치지 않았다.
그저 섬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에 알맞은 곳이구나. 그렇게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다시 살아가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인생은 그리움에서 그리움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까지도.
가을과 겨울 그리고 다시 가을. 청산도에는 총 세 번을 입도했고 그때마다 걸어서 어디든 갈 수 있는 섬이 꼭 내 것처럼 느껴졌다.
섬에서 섬을 바라보는 풍경은 더는 다다를 데가 없다는 점에서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청산도에 들어왔을 때부터 섬의 끝자락에 와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걷기 시작하자 새로운 끝이 있었다. 자주 오가던 골목에 건물이 들어서고, 나중에 다시 찾으려고 했던 카페가 사라지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어제도 분명 있었을 길이 처음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것은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만들었다. 그러고 나자 나는 섬에 그리워하러 온 게 아니라 누군가를 더 깊이 좋아하기 위해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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