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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충좌돌

인공지능과 인공양심
AI 시대가 도래하며 ‘판단력’의 정체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AI가 대체할 것으로 전망되기도 하는 전문적인 ‘법조인’이나 ‘의사’의 일은 판단력이 핵심인 까닭이다. AI가 자신의 영토로 삼으려 도전하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 바로 판단력이며,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갖출 수 있느냐에 따라 AI의 성공 여부도 결정되리라.
판단력은 인간 정신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한 번의 판단에 따라 개인이나 집단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우리는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 ‘오판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판단은 그냥 천부의 능력으로서 판단력이 담당한다. 판단력은 학습될 수 없는 것임을
혹시라도 판단력의 계발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운전이나 테니스 같은 실제적인 ‘연습’의 문제이다. 판단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칸트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이다. 다소 낯선 명칭이지만 이 두 가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보편적인 규칙이 주어졌을 때 개별적인 것들을 그 규칙 아래 포섭하는 능력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가령 법조문이 주어졌을 때 어떤 사건이 그 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지 판정하는 능력이 규정적 판단력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법의 적용 문제는 이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반성적 판단력은 규칙이 주어지지 않고 개별적인 것만 있을 때 이 개별적인 것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규칙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반성적 판단력은 의사의 진찰 행위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 전반에서 흥미롭게 작동한다. 어떤 사람들은 눈치가 빠른데, 이 눈치의 정체가 반성적 판단력이다.
만일 AI 의사가 가능한 시대가 온다면, 그것은 저 천부의 능력인 반성적 판단력과 규정적 판단력을 AI가 습득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AI는 이런 판단력을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판단력은 우리가 다룬 것보다 훨씬 풍부한 작용을 담고 있다. 판단력은 단지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그것이 속하는 보편적인 규칙을 발견하거나, 보편적인 규칙이 주어졌을 때 그에 따라 개별적인 것을 판단하는 능력에 그치지 않는다. 판단력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가치가 관철되기를 ‘요구’한다.
판단은 실현해야 할 정당하고 건전한 가치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판단력은 능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제기될 수 있는 요구이다."
판단력의 위대함은 지식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바로 도덕적 이념에 비추어 이런 사태가 일어나도 괜찮은지 심판하고 비난하는 데 있다. 도덕적 가치에 입각한 이런 판단(심판)은 인간의 운명을 다루는 의학과 법학의 핵심을 이룬다. 판단력을 습득한 AI가 보편적 규칙을 발견하거나 적용하는 지식의 획득 차원에 그치지 않고, 가치라는 심급에 따라 ‘이렇게 되어서는 안 돼’라고 요구하는 판단력의 화신이 될 수 있을까? 만일 정말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공양심’일 것이다.
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
우리는 참 많은 시험을 보고 살아왔으며, 그만큼 우리 주변에는 늘 문제가 있어왔다. 문제를 푸는 일은 어려웠지만, 문제 자체는 자동적으로 늘 앞에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해온 것이 인류이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한 집단의 사활이 걸려 있었다고 해도 좋겠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일이리라. 그런데 사람들은 진정 중요한 것인 ‘문제 자체’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대해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구별되는, 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무엇인가?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가령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라. 오늘날 우리 사회의 난점들을 요약하는 ‘하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결코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매우 난감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문제를 해결하는 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은 바로 문제를 발명해내는 일인 것이다. 사람들은 문제의 해결이 인생의 가장 어려운 모험인 듯 도전하지만, 자신이 매달리는 그 문제란 누군가가 더 험난한 길 속에서 이미 창안해낸 것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혹시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힘은 비범한 다른 이의 몫이고, 애초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없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 누구나 문제 자체를 창안해내는 소질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교육의 의미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 진정한 교육이란, 문제에 답안 하나를 공들여 제출하는 길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창안해내는 소질을 빛나게 해주는 것이다.
철학과 매스미디어
매스미디어란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잡지, 영화, 광고 등 불특정 다수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를 뜻한다. 물론 전달되는 정보는 진실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매스미디어는 철학의 친구이다. 철학philosophy이 ‘진실한 앎sophia’에 대한 ‘사랑philos’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철학과 매스미디어, 둘 다 진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철학이 궤변에 시달리는 것처럼 매스미디어 역시 거짓과 경박함에 시달린다.
매스미디어는 새로운 것에서 또 새로운 것을 쫓아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뭔가 진기한 구경거리를 제공하듯이 철학자를 제공한다. 이때 철학자는 세계의 위협적인 비판자가 아니라, 안전하게 유지되는 세계의 일부이다. 그저 세계가 관리하는 ‘문화’의 한 진기한 모습이다. 그가 아무리 신랄하게 비판하더라도 문화는 그 비판조차 너그럽게 자신의 일부로 흡수한다. 문화와 함께 모든 것은 제자리이다. 처음엔 흥미를 끌다가 곧 사라져버리는 많은 것들처럼, 철학자는 그의 사상이 미처 이해되기도 전에 낡은 것으로 버려지고 또 잊힌다.
진실을 전달한다는 그 기본적인 사명에 비추어 보자면, 역설적이게도 미디어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게 한다. 그런 점에서 미디어는 진리를 거짓으로부터 가려내는 일을 사명으로 삼는 철학의 경쟁자이다.
신문과 텔레비전 등 매스미디어는 흔히 말하듯 정보의 홍수를 이룬다. 모든 자료와 그에 대한 모든 반박 자료, 그리고 수많은 관점이 공존한다.
매스미디어가 사라진 세계를 꿈꿀 수 있는가? 그런 꿈은 공허하다.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매스미디어가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편이 좀 더 현실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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