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은 완전히 박멸될 수 있는가? 위생의 기준이 더할 나위 없이 높아져서 기생충은 과거에 비해 많이 사라졌으며, 기생충에 대한 혐오감 역시 더욱 가차 없어졌다. 그러나 형태가 어찌 되었든 우리는 늘 기식자와 함께 살아왔다. 하찮아 보이지만 떠나지 않는 온갖 고질적인 질병이 알려주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숙주로서의 삶이다.
가졌다.
숙주의 입장에서 기생충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박멸의 대상이다. 기생충에 대한 논의도 박멸이라는 과제에서 완성되고 끝난다. 그러나 기생충의 행위 유형은 그 이상의 의미 있는 성찰 대상이다. 기생충은 다분히 주체의 근본적 지위를 뒤흔드는 현대철학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 기생충은 근대적 주체(가령 데카르트의 ‘실체’)와 달리 독립된 주체로 있을 수 없고 말 그대로 다른 것에 기생함으로써만 존재한다는 점, 즉 숙주 없이는 정체성이 없다는 점, 그리고 동일성을 지닌 주체로서가 아니라 숙주의 동일성을 파괴하는 데서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식자라는 개념을 숙주의 관점에서 박멸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그 개념의 더 넓은 가능성에 대해 눈감는 일이다. 기식자는 숙주를 새로운 차원에, 새롭게 창조된 길 위에 올려놓는 자이다. 그런 점에서 생리학자 레리슈Rene Leriche의 말은 매우 흥미롭다.
질병은 인간에 붙어살고 있는 기식자, 그것이 탈진시키는 인간을 뜯어먹고 살아가는 기식자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생리학적인 질서의 일탈, 처음에는 미미한 그런 일탈의 결과를 본다. 질병은 결국 하나의 새로운 생리학적인 질서이다. 치료학은 병에 걸린 인간을 이러한 새로운 질서에 적응시켜야 한다.6
이 말이 단지 생리학에만 해당하는가? 그렇지 않다. 영화 <기생충>이 한국 사회에서 가리켜 보이는 지점 역시 저 말에 포개진다. 우리의 사회적 벽들은 타인(기식자)의 개입을 통해 부서질 수밖에 없다. 타인의 침투는 방어되거나 거부될 문제가 아니라, 침투받은 자를 변화하게 만드는 문제, 새로운 신체와 질서를 탄생시키는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