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가 언제적 노래던가. 신라의 향가 중 하나다. 향찰로 적혔다는 신라 노래. 우리 글자가 없어서 한자를 이용해 우리말을 나타내려고 했던 갸륵한 의도로 기록된 노래. 시인은 풍요의 한 행으로 한 권의 시집을 꾸렸다. 풍요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이제 이 시집은 서러움에 젖은 영혼들을 불러 모아 달래려 할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은 독자의 몫일 테고.
'정선' 한 편을 얻는다. 한 권의 시집에서 온전한 한 편의 시를 얻었다면 이건 다행인가 아닌가.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기로 하고, 다행으로 여기려고 한다. 이마저 얻지 못했다면 얼마나 서운했을까. 이 시를 옮겨 쓰는 동안 정선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했던지. 정선은 이제 이 시인에게 이름 불린 도시로, 이 시인으로 인해 시에 남은 도시가 되었다. 나는 이것도 좀 부러웠다.
그리고 남은 시들은 섭섭하게도 내 취향에서 멀었다. 이성복의 시들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어서 이 시집도 기대하고 읽었는데. 이유를 또 따져 본다. 내가 어떤 부분에서 거북했는지. 시어들 때문이다. 내가 그다지 아끼지 않는 시어들, 따라 써 보고 싶지 않은 구절들, 그리고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거친 이미지들. 내가 시에 대해 편협된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이제 와서 내가 좋아하는 시의 분위기를 놓치거나 바꾸고 싶지는 않으니까.
시와 시어에 대해서만큼은 나만의 아름다운 기준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확실하게 느낀다. (y에서 옮김2018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