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단언한건대, 엘리네에게 내 마음을 고백한 적이 없었으니까, 결코, 절대로, 나는 지금껏 어떤 여자에게도 감히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엘리네가 거기 서 있었다, 이 아름다운 한여름 밤 내게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이건 현실이라 할 수 없었다, 이건 꿈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환영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유령일지도 몰랐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부둣가에 서서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엘리네일 리는 없었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p.49~50
크리스마스 직전의 오후, 누군가 쓰러져가는 낡은 집의 문을 두드린다.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책들은 사방에 널려 있으며, 온통 어질러져 있는 지저분한 집에 살고 있는 엘리아스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그의 집을 찾아오던 친구 야트게이르는 여자가 생기고 나서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고, 그것이 벌써 수년 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다. 유령일까, 혹은 자신의 착각일까 생각하며 점차 겁이 나기 시작한 그에게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번에는 진짜 야트게이르가 나타난다. 하지만 오랜 친구인 그는 그냥 잠깐 인사만 하려고 들렀다며, 금방 돌아간다. 그리고 엘리아스는 상점가에 나갔다가 야트게이르가 바다 위에 떠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자신과 얘기를 나눈 지 삼십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몇 시간 전에 익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총 3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야트게이르의 시점으로 짝사랑하던 엘리네와 재회하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1장, 그의 친구인 엘리아스의 독백으로 채워진 2장, 그리고 엘리네의 남편 프랑크의 관점으로 서술되는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부인 야트게이트는 자신의 배에 '엘리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는 그 배를 타고 바임에서 대도시인 비에르그빈으로 간다. 헐거워진 단추를 다시 달기 위한 바늘 한 개와 검은 실 한 타래를 사기 위해서였는데, 힘들게 구했지만 가격이 무려 250크로네라는 걸 알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두 번이나 상인들에게 그렇게 사기를 당해 지긋지긋해진 마음으로 돌아가려는데, 우연찮게 오래 전부터 짝사랑했던 엘리네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불행하다고,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다시 고향인 바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야트게이르는 그녀와 함께 바임으로 향한다.
지금 나는 사트로트의 순에 있는 내 거실, 내 고향집 거실에 앉아, 부두에 정박해 있는 나의 너무나 아름다운 배 엘리네를 내다보면서 생각한다, 내 나이 일흔다섯이 될 동안, 나는 엘리네와 나에 대해 그토록 자주 곱씹어보았지만 결국 다다른 생각은 모든 것이 참으로 이상했다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내 묘비에는 이렇게 적어야겠다고 생각해 왔다─모든 것이 이상했다─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하니 그저 단순한 십자가 하나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다 내 묘비에는 십자가 하나만 있으면 된다, p.192
1장에서 벌어진 야트게이르의 이야기는 2장에서 그의 친구인 엘리아스의 독백으로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들은 야트게이르가 멀리 다른 곳에서 결혼한 여자를 데려왔다고 '유부녀 납치 사건'이라고 그 상황에 대해서 말한다. 여자의 남편이 언제든 바임으로 와서 아내를 데려갈 거고, 야트게이르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들 했다. 하지만 별다른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고, 유일한 친구였던 야트게이르와 엘리아스의 관계도 점차 소원해진다. 3장에서는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다가왔다가 또다시 갑작스럽게 떠나간 엘리네에 대해 추억하는 그녀의 남편 프랑크의 이야기가 보여진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운명처럼 이끌려 살았던 그의 수수께끼 같았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이 중심 서사이다. 이상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 들어왔다가 역시나 이상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에서 떠나버린 엘리너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지만, 작품은 그렇게 세 남자의 시점으로 한 여성에 대해 서술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욘 포세는 <아침 그리고 저녁>, <멜랑콜리아> 등에서 보여줬던 것과 같이 이 작품에서도 마침표 없이 쉼표로만 이루어진 텍스트로 압축과 반복으로 특유의 리듬감을 만들어 낸다. 단순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등장 인물이 많은 것도 아니며, 커다란 사건이나 갈등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는 흡입력을 발휘하고 있다. 욘 포세는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 이미 희곡을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입센 다음으로 가장 많은 작품이 상연된 노르웨이 극작가’로서 현대 연극의 최전선을 이끌고 있으며, 언어가 아닌 언어 사이, 그 침묵과 공백의 공간을 파고드는 실험적 형식으로 ‘21세기 베케트’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은 마치 연극의 독백처럼 천천히 읽히며, 누군가의 생을 압축적으로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과장되지 않게 담백하게 쓰여 있어 쉼표와 쉼표 사이 여백이 깊이있게 느껴지곤 했다. 특유의 리듬이 특별한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어 어느 순간 그 나직하고 고요함 속에 몸을 맡기면 물 흘러가듯 페이지가 넘어가곤 한다. 이 작품은 <바임 호텔>, <바임 위클리>로 이어질 '바임 3부작'의 첫 권이다. 2025년부터 2027년까지 3년간 매년 한 권씩 이어질 작품이라 다음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