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세상에 정의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세요?"
"미안합니다. 뭐가 존재한다고요?" 그 멍청한 질문, 혹은 사람을 멍청이로 여기는 질문은 제대로 들렸다.
"정의요." 여자는 물러서지 않고 되풀이했다.
멍청한 질문이라는 의견은 철회한다. 나는 여자의 속셈을 모를 뿐이었다.
"존재하지 않겠죠."
"어머, 거짓말을 하는군요." p.146
신주쿠에 위치한 허름한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를 운영 중인 탐정 사와자키. 그가 사백여일 동안 도쿄를 떠나 있다 오랜만에 돌아오면서 맡게 되는 사건은 십 일년 전 승부 조작 사건에 얽혔던 전직 고교 야구 선수가 의뢰한 누나의 자살문제이다. 당시에 의뢰인인 우오즈미 선수의 가방에서 다섯 개의 돈뭉치가 나와 승부조작 혐의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일주일 뒤 그의 혐의는 무죄로 풀려난다. 하지만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지도, 동생과 통화를 하지도 못한 그의 누나가, 풀려나기 전날 아파트 6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려 십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나는 그런 일로 자살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며, 누나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명백한 자살이고, 사고나 타협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대체 왜 그는 '누나가 그런 문제로 자살할 리가 없다'는 말을 십일 년 동안 계속하고 있는 걸까.
사와자키는 증거도 없고, 물증도 없는 십일 년 전의 사고를 향해 차근차근 다가선다. 비정한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 각자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고독한 중년 탐정 사와자키는 자신의 원칙대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 빠른 전개와 깜짝 쇼처럼 놀라게 하는 반전에 익숙해왔다면, 하라 료의 하드보일드 미스터리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작품에서 사와자키 탐정이 의뢰인을 만나기까지 할애되는 페이지가 무려 100페이지이다. 이러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의뢰인이 안 나오는 거 아니야? 하는 조바심이 들 정도가 되어야, 사와자키는 의뢰인을 만날 수 있게 된다. 탐정이 의뢰인을 만나야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되니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가 펼쳐질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늘어지거나, 지루한 부분이 없다는 것도 하라 료의 작품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이번에 아주 오랜 만에 다시 읽었음에도, 여전히 이 두툼한 분량의 이야기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처음 이 작품을 만났던 것이 십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미있게, 푹 빠져서 다시 읽을 수 있다는 점도 놀라운 일이었다.
"...... 사실이 밝혀졌을 때 저는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게 새로운 수수께끼를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요?"
우오즈미 아키라는 가까운 곳에 있는 절실한 하나의 '왜'에 얽매어 십일 년을 살아왔고, 결국은 더 많은 '왜'를 떠맡아버린 모양이다. 젊은이들이 걷는 길은 늘 그렇다. 살아 숨쉬는 인간에게 생기는 수수께끼는 답이 하나뿐인 책상 위의 수수께끼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눈앞에 있는 스물아홉 살 청년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 내 기분은 바로 상대에게 전해졌다. p.515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내가 죽인 소녀>를 잇는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 세번째 작품이다. 국내에는 2013년에 나왔었고, 이번에 전면 개정판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신주쿠 뒷골목의 중년탐정 사와자키의 활약상을 담고 있는 '탐정 사와자키'시리즈는 <안녕 긴 잠이여> 이후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지금부터의 내일>로 이어졌고 총 다섯 편의 작품과 <천사들의 탐정>이라는 단편집까지 모두 출간되어 있다. 하라 료의 새로운 작품을 더 이상 만날 수 없어 아쉽지만, 이렇게 시리즈와 결을 맞춘 새로운 재킷 디자인으로 번역을 다듬어 나와 컬렉션으로 모아 둘 수 있어 좋다. 하라 료는 자타가 인정하는 독보적인 과작(寡作) 작가이다. 데뷔 이래 19년 동안 단 여섯 권만을 썼을 뿐이다. 사와자키 시리즈 세 번째 작품 <안녕 긴 잠이여>는 전작 이후 6년이 걸렸고, 네 번째 작품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는 9년이 걸렸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러한 집필 태도부터 하드보일드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
하라 료의 작품에 대해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단어는 ‘하드보일드’이다. 흔히들 ‘하드보일드 범죄소설’이라 칭해지는 부류는 범죄나 폭력, 섹스에 대해 이렇다 할 감정 없이 무미건조한 묘사를 하고, 비정하며, 냉혹한 사회의 모습을 불필요한 수식 없이 날 것 그대로 묘사하는 수법으로 지칭된다. 추리소설에서 ‘추리’와 ‘사건해결’ 그 자체보다는 탐정의 ‘행동’에 중점을 두는 하나의 유형이라 하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하드보일드는 스토리 그 자체로서의 매력보다는 문체와 스타일에서 묻어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라 료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광팬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테니, 이번 작품 <안녕 긴 잠이여>라는 제목이 챈들러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따온 거라는 건 눈치 챘을 것이다. 사와자키 탐정은 챈들러의 필립 말로만큼이나 시크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그래서 그가 툭툭 뱉어내는 말투, 그리고 행동에 대한 묘사에서 빚어지는 그 분위기를 좋아하는데, 의외의 장면에서 유머가 만들어지는 문장들이 이 작품 속에도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모든 시리즈는 개별 작품으로 읽어도 각각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아직까지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를 만나본 적이 없다면, 이 작품으로 시작해보길 권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