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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만 얽매이는 직역이 낮은 포복이고원문보다는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중시하는 의역이 고공 비행이라면 나는 아슬아슬한 저공 비행이 좋다고 생각했다.˝
   ―머리말에서​ 

마지막 장을 덮고 다시 앞표지를 펼쳐 머리말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읽는 내내 왼손에 쥐고 있던 노란색 형광펜으로 ‘저공 비행’이라는 글자에다가 동그라미를 쳤다. 번역에 발을 들이고부터 문장을 옮기는 순간마다 고민했던 문제가 한 점으로 모이는 기분이 들었다. 책 페이지를 넘기면서 내가 지향하는 번역의 태도란 무엇이고, 지향점과 실제의 간극은 어느 정도인지 거듭 돌아본 까닭이다.

번역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장 앞에서 갈림길에 선다. 이 책에서 도입한 들이밀기와 길들이기 개념이든, 정숙한 추녀와 부정한 미녀라는 오래된 비유든 도무지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수없이 빠지는 것이다. 직역이냐, 의역이냐. 번역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었고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이 논쟁에 과연 답이 존재하기는 할까? 번역가가 백 명이라면 백 가지 답이 나올 테고, 천 명이라면 천 가지 답이 나올 텐데. 더구나 그 어떤 답도 완벽히 틀리거나 완벽히 바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답이든지 모두가 ‘보다 낫고, 더 오롯한’ 번역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제 나름대로 일리 있는 방향을 제시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번역가가 그저 책의 맥락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언어 자체의 특성은 물론 그 언어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자처해서 서로 다른 언어를 좁히고 덧붙이고 짝짓고 뒤집어 어떨 때는 들이밀고, 어떨 때는 길들이느라 끙끙댈 수 있는 원동력은 조금이라도 더 좋은 번역을 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온다. 다만 이러한 열망을 실현하려 고민하고 애쓰는 사이 저마다 특정한 방향이 생길 뿐이다. 이 책 『번역의 탄생』 역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번역 현장을 지켜온 한 번역가가 ‘원문에 충실하되 한국어로서도 자연스러운 번역’을 하고자 끊임없이 고뇌한 결과물이지 않은가. 머리말과 목차만 훑어봐도 번역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기록을 보며 나는 벅차고 감사했다.

막 번역 공부를 시작했을 무렵, 아무래도 번역은 직역과 의역으로 양분할 대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 순간 머릿속이 환해지면서 커다란 원석 하나가 마음속에 쿵 떨어졌다. 덩어리가 어찌나 크고 울퉁불퉁한지, 마음에는 들지만 좀처럼 다루기가 어려운 녀석이었다. 처음에는 넋 놓고 바라만보다가 번역 공부를 진행하면서 틈틈이 달려들어 조금씩 갈고닦았다. 깎고 다듬을수록 원석은 차츰 작아져서 어느 틈엔가 내가 감당할 만한 광석이 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반들반들해진 광석을 필요에 알맞은 물건으로 가공하는 일인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간 애지중지 품어온 광석을 무엇으로 만들어야 할지 결심이 선다. 균형추다. 포복보다는 비행을 지향하는 내가 자칫 너무 높이 날아오르지 않도록 붙들어줄 균형추.

내 균형추는 어떻게 완성될까. 여전히 문장 앞에서 갈림길에 설 때마다 직역과 의역의 딜레마에 빠지는 것을 고려하면 갈 길이 요원해 보인다. 어쩌면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어제보다 더 쓸모 있는 균형추를 만드는 번역가가 되고 싶다. 누가 알겠는가? 계속 애쓰다 보면 언젠가는 완벽하게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추를 손에 넣을지! 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오롯한 번역이 나오는 균형추를 매달고 글자와 행간을 비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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