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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
  • 나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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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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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게 잊고 지내던 혹은 잊은 줄 알았던 순간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콧속을 파고드는 등나무꽃 향기에서 기시감을 느낄 때, 손에 닿은 미지근한 약숫물이 누군가의 체온과 비슷할 때, 전혀 다른 사람 입에서 예전에 들었던 것과 비슷한 말을 들었을 때.


아, 맞아.

그때도 이 향기가 났는데.

그 애 손이 땀으로 촉촉했는데.

그 말에 내 마음이 조각조각 부서졌는데.


여태 내 안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기억의 편린이 울컥 의식 표면으로 떠올라 물밀듯 들이닥친다. 갑작스레 밀려든 기억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아서 때론 외면하고 싶기도 하지만, 어떤 기억에 대해서든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 기억이 아로새겨진 그때 그곳에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내 몸으로 직접 감각한 풍경과 소리, 체온과 마음이 어디로도 떠나지 않은 채 바로 그 순간에 붙박여 있다는 깨달음. 깊은 호수 같은 무의식에 잠겨 있어 아득했을 뿐 사라지지 않은 기억이 내가 떠올리지 못할 때에도 내 안에 상주하고 있다. 몸소 느꼈기에 몸속에 담긴 온전한 내 것. 그것이야말로 나라는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할 수 있는 증거이지 않을까. 에드워드 애슈턴의 『미키7』에 등장하는 익스펜더블 미키7과 미키8이 같은 기억을 이식받은 육체로 같은 공간에 존재할지라도 각기 다른 개체로서 살아갔듯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안과 정한은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기억이 자의적, 타의적으로 결락된 인물이다. 둘은 구멍 난 부분을 제 힘으로 메울 수 없기에,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불안정한 자아가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신호를 송신한다. 공통의 기억을 가진 저 아닌 사람을, 제 자신을 자신으로 존재하게 해준 사랑의 상대를 찾아 도시의 무성한 소문 사이를 헤맨다. 필사적으로 머릿속 목소리를 듣고, 말을 걸고, 흔적을 복기하여 마침내 호수 표면으로 떠오른다. 표면에 이는 물살과 허공을 부유하는 공기와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진동과 흔들리는 소리를 비로소 감각한다. 그렇게 안은 안이 되고, 정한은 정한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완성하는 마지막 한 조각”은 뇌와 컴퓨터 인터페이스의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ID칩으론 맞출 수 없다. 우리가 우리 몸으로 느낀 바로 그 순간, 순식간에 흘러가 버리기에 도리어 변질할 수 없는 찰나의 기억이야말로 모든 것을 완성하는 영원의 한 조각이다.

기억에도 저마다의 역할이 있다면 안에 대한 기억은 정한의 외부와 내부, 두 세계를 연결하고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채널과 같은 역할을 했다. 안을 통하지 않는다면 정한을 둘러싼 세상은 현실감각이 제거된 이미지의 무한한 연속일 뿐이었다.- P31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고유한 기억이 필요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그래야 시작할 수 있어.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이야기를 말이야. 그게 단 한 장면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P88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며 수차례 가공을 거친 블루진프로젝트는 더 이상 정한이 아는 그것이 아니었다. 사실과 거짓은 끊임없이 뒤섞이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P147
"시나리오는 모든 게 결정된 세상이야. 결정된 일 외엔 어떤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지. 그 밖의 모든 건 형태를 갖기도 전에 오류로 잡혀서 사라져 버려. 그러니까 여긴, 실은 아무것도 없는 곳인 거야. 텅 빈 공간."- P272
바람이 닿은 호수의 표면에 작은 물살이 일었다. 세상의 크고 작은 소리들이 한꺼번에 흘러들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습한 공기, 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 가로수의 잎이 흔들리며 서로를 스치는 소리까지도. 안은 눈물을 닦아 냈다. 저 멀리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따금 속력을 높인 차들이 지나가는 대로 너머에서, 혹은 연구동과 맞닿은 호수의 건너편에서, 거듭 덧대어진 그 모든 풍경 속에서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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