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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의 내맘대로 책방
  • 생명을 짜 넣는 노동
  • 고병권
  • 12,510원 (10%690)
  • 2019-04-29
  • : 824

8046.생명을 짜 넣는 노동-고병권

살아 있는 노동이 죽어갈 때 죽은 노동은 살아납니다. 살아 있는 것은 죽고 죽은 것이 삽니다. 영원한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존재. 마르크스는 이것을 '자본'이라고 부릅니다.(10)

1.

글을 쓴다는 것도 '운명'과 이어진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글은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써지지 않고, 어떤 글은 전혀 쓸 의도가 없는데도 써지는 것을 보면, '운명'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는 말입니다. 쓰고자 노력해도 써지지 않는 것과 쓰지 않으려 했는데도 써지는 것을 과연 운명이라는 말이 아니고 다른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의 서평을 쓰면서 저는 '운명'이라는 단어의 힘을 실감합니다. 앞에 쓰려고 했던 서평은 반드시 써야한다는 생각을 했음에도 쓰지 못해 지워버렸고, 쓸 의도가 없었고 책이미지만 덩그러니 남겨 두었던 이 책의 서평은 지금 쓰고 있는 걸 보면 진짜로 운명은 존재하나 봅니다.

이 책의 서평이 써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두 가지 요인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순수이성비판1> 이후에 읽은 책들은 순서대로 써야겠다는 의지. 사실 <순수이성비판1> 이전에 읽었으나 서평을 쓰지 못했던 책들의 서평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이상하게 안 써지더군요. 제가 게을러서 그런가?^^;; 게으름도 한 몫을 했겠지만, 쓰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고, 안 써지는 것도 사실이기에, 둘을 합치면 '안 써진다'라는 중간적인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안 써지니까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혹시라도 미래에 쓸 수 있다면, 만약 그때 그 책들의 서평이 써진다면, 그때는 쓰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써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네요. 아무튼 <순수이성비판1>이 준 커다란 충격은 제 뇌를 공백 상태로 만들었고, 그 공백 상태 이후에는 안 써지더라도 반드시 써야한다는 강박이 남았습니다. 무지의 공백을 어떻게든 메워여 한다는 의미에서요. 이 책도 평소 같았으면 쓰지 않았겠지만, 무지의 공백이 준 강박이 저로 하여금 의자에 앉아서 글을 쓰게 만듭니다.

두번째는 제가 예전에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분의 글을 보고 나서 무언가 떠올라서였습니다. 10년 넘게 다니다 떠난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분들인데요, 그분들은 지금 나름의 독서 스터디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어떤 사상가의 책들을 읽었나 봅니다. 한분이 스터디가 끝나고 무언가 감명이 깊었는지 글을 남겼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욕구를 느껴서 계속 그 글을 쳐다보았습니. 너무 할 말이 많아서요. 욕구를 참을 수 없어 이 책의 서평이라는 형태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왜 하필 이 책의 서평이냐구요? 이 책의 책표지가 바로 눈앞에 있고, 이 글을 쓰기로 했으니까요.ㅎㅎㅎㅎ

이제 본격적인 서평을 시작해야겠습니다. 앞에 잔뜩 글을 써놓고 본격적으로 서평을 시작한다고 하니 뭔가 이상한데요 ㅋㅋㅋㅋ,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밑에 적으려는 글이 진짜 시작이고, 그 앞에 써진 글들은 그 글을 위한 밑거름 정도이니까요. 그럼 빨리 그 글로 넘어가 볼께요.

2.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분이 글을 남겼다. 그 분은 어떤 사상가의 책들을, 생각을 공유하는 다른 이들과 함께 읽고, 함께 공부하며 큰 감명을 받았나보다. 글 마디마디마다 그 사상가에 대한 사랑이 넘쳐났다. 그런 사랑이 가능했던 건, 다른 이들과 함께 했던 그 시간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그 시간을 거치며 본인의 앎과 자아가 성장했다고 걸 본인이 느끼고, 본인이 그 성장에 대해서 사랑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좋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함께한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함께 했었던 시간을 사랑하고, 함께 읽었던 책을 사랑하고, 함께 읽었던 책의 저자를 사랑한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러나 문제는 그 분이 사랑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만 한다는 건, 사랑하는 대상의 삶을 제대로 모른다는 말이다. 사랑만 한다는 건, 사랑하는 대상의 삶을 다 보지 못한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평범한 사랑의 과정을 생각해보라. 만남이 있고, 만남 뒤에 사랑이 가져다주는 행복한 '낭만화'의 과정이 있다. 저 사람은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그렇게 해서 좋다. 아니, 사실 그 사람이라서 좋다. 사랑에 빠지면 낭만화의 과정은 필연적이며,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이제 냉각기가 다가온다. 낭만은 사그라지고, 관계는 일상적인 삶이 된다.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랑의 미래가 결정된다. 위기를 잘 넘긴다면, 사랑은 이어질 것이고, 위기를 넘기지 못한다면 이별의 순간이 다가온다. 이렇듯 사랑의 과정은 사랑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위기와 그 위기를 넘어서는 관계의 힘 같은 것들도 사랑의 과정에 포함된다. 낭만적 사랑은 사랑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앞에 내가 이야기했던 분은, 내가 보기에 낭만적 사랑의 과정에만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 사랑만 하기에. 그분은 그 사상의 약점, 비판받을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는 것처럼 말한다. 어떻게 한 사람의 사상이 좋은 점만 있을 수 있겠는가.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사람의 사상을 사랑만 한다는 건, 나에게는 균형을 상실한 위태로운 걸음처럼 보인다.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취향의 음미가 아닌, 지적인 사상과 생각들을 대할 때는 사랑만 한다는 건 얼마나 위험한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맹신이나 광신의 위험성을 그분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글에 쓰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그 사상을 넘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그 사상을 넘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건, 그 분이 아직 그 사상을 자기화하지 못했다는 말이며, 그 사상이 가진 폭과 넓이와 깊이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 사상이 나온 시대적 맥락을 자기 삶의 맥락과 일부만 연결시켰다는 말이다. 사상을 자기화했다면, 그 사상을 객관화해서 바라봤다면, 그 사상의 맥락을 넓고 깊게 바라봤다면, 그 사상의 맥락을 자기 시대의 삶과 폭넓게 연결했다면, 결코 좋은 말만 나올 수 없다. 좋은 말만 나온다는 건, 그 사상을 자기화하지도 못했으며, 그 사상을 넘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사상 그대로 머무른다면, 좋은 말만 해도 된다. 그러나 고인 물은 썩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멈추어 선다면 뒤쳐지는 것이 세상의 흐름인데, 머무르기만 해서 되겠는가. 하나의 사상을 읽고 공부했다면, 그 사상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해야 되는 것이 공부하는 자의 자세 아니겠는가. 굳이 청출어람의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다. <임제록>에 나오는 '살불살조'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너무 앞서 나가는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랑만 하는 건, 글에 사랑만 남아 있는 건, 배우는 이의 자세로 결코 좋은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함께한 이들에게 보인 글이기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함께한 이들에게 보내는 글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랑만 보이는 것이 옳은가. 내 이야기가 그분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건 과도한 오해이고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앞으로 그분이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미래는 바뀔 수 있고, 지금의 내 생각은 헛된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 글만 보면, 그 분이 아직 사랑만 하고 있는 게 맞다. 그리고 사랑만 하고 있다면, 사랑만 하고 있는 그분의 모습은 충분히 나에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부디 그분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그 사상가를 사랑만 하지 말고, 그 사상가를 폭넓게 파악해서 그 사상가를 넘어서서 자기 자신만의 사유를 하기를. 이것이 지금까지 읽고 배우며 생각해온 내 삶에서 내가 '그 사상가를 사랑만 하는 그분'에게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다.'

3.

써놓고 보니 마르크스 책인데, 마르크스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전혀 다른 이야기만 계속 하고 있군요.^^;; 그래도 위에 글을 쓰고 나니 속이 시원해지네요. 속이 시원해지고 싶어서 이 글을 썼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습니다. '속이 시원해진다'는 목적을 달성했기에 이제 위의 글과 <생명을 짜넣는 노동>을 연결시켜서 적어보겠습니다. 위에 글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사랑'이겠죠. 이 '사랑'이라는 단어는 마르크스 <자본론> 1권을 상세하고 세밀하게 해설하는 총 12권의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의 5권인 <생명을 짜넣는 노동>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자본과 사랑이 이어지느냐? 그건 '자본의속성' 및 '자본과 자본가의 관계'와 연관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자본은 화폐와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한 교환에서 그치고 마는 화폐에 비해, 자본은 자기 자신의 증식을 목표로 합니다. 자본을 투자해서 자본을 늘리는 무한순환.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늘리는 흐름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본가는 그 흐름 속에서 자본의 자기 증식을 대행하는 존재입니다. 자본주의라는 큰 흐름 속에서, 자본의 욕망을 좇아서, 자본가는 자본의 욕망을 대리하여 자본의 자기 증식을 행합니다. 아마도 자본가는 그런 착각을 할 것입니다. 자본의 자기 증식이 자기의 욕망이라고. 이걸 사랑이라는 단어로 바꿔보겠습니다. 자본가는 자본을 사랑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자본가는 자본의 자기 증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자본의 자기 증식을 사랑하는 자본가. 바꿔 말해도 됩니다. 자본도 자본가를 사랑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대행해주니까요. 제 생각에는 자본가가 자본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자본이 자본가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자본의 자기 증식이라는 욕망을 알아서 수행해주는 도구니까요. 자본주의는, 자본과 자본가의 사랑이 넘쳐나는 사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빠진 존재들이 있습니다. 자본과 자본가의 사랑 사이에서, 자본의 자기 증식을 수행하는 실체적인 존재들인 노동자들.

4.

자본의 자기 증식이든, 자본가가 자본의 욕망을 따라서 행하는 자본의 자기 증식이든, 실체적으로 이 욕망을 이루어내는 존재는 노동자들입니다. 원료와 재료를 합해서 상품을 만드는 존재도 노동자들이고,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력을 바치고 잉여가치를 통해 자본가들에게 이득을 선사하는 존재들도 노동자들이고, 자본의 자기 증식을 몸으로 손으로 이루어내는 존재들도 노동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사랑은 머나먼 이야기입니다. 자본가에게 고용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통해 만들어진 상품이 자기 것이 아니기에 생산품에서 소외되어 있고, 자신이 하는 노동 자체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본가의 의지에 따라 하는 것이기에 노동에서도 소외되어 있습니다. 이 이중의 소외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을, 자신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상품을 사랑하지 않게 만듭니다. 이건, 노동자가 자본과 자본가 상호간의 사랑에 끼여들지 못하게 합니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 자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노동자는 자본주의가 형성해내는 자본과 자본가의 사랑에 끼여들 수 없습니다. 노동자로 계속 산다면 평생 그 사랑에 끼여들 수 없는 것이죠. 사랑이라는 입장에서면, 노동자는 자본주의가 외치는 자본가와 자본의 사랑 노래에 끼여들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랑 노래의 객체인 것입니다.

5.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노동을 살펴보면, 노동자는 생명력 없는 원료들을 가공하며 자본의 자기 증식 욕망이 생생히 살아 있는 상품들을 만들어냅니다. 죽은 것들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노동자의 노동.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을 통해 자본의 자기 증식 욕망(마치 그것이 자신의 욕망인 것처럼)을 실현하고,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당연히 자본도 그 과정을 통해 생생히 살아 있게 되죠. 반대로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력을 짜넣고 생명력 없는 물질들을 자본의 욕망이 살아 숨쉬는 상품으로 만듬으로써, 애정없이 소외된 채 죽음으로 달려나갑니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노동자의 노동, 죽은 물질에서 자본주의의 욕망이 살아 숨쉬는 상품의 탄생을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향하는 자본과 자본가. 이 둘의 교차가 <생명을 짜넣는 노동>이 그려내는 모습입니다.

6.

위에 빨간색 글씨로 쓴 글을 이제 저 자신에게 돌려줄 차례입니다. 저는 아직 마르크스에 대해 잘 모릅니다. 당연히 <자본론>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잘 모르니까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더군다나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지켜본 인물로서 마르크스가 다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공부가 더 필요하겠죠. 공부하고 파악해서 마르크스라는 인물의 사상을 내 나름대로 사유할 생각입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나만의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비판도 가능하겠죠. 이 때의 비판이란, 시중에 떠도는 정치적인 비판과는 결이 다를 겁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비판이니까요. 그 비판이 가능할 때 비로소 저만의 공부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힐 겁니다. 그때까지 계속 공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만 하지 않고, 마르크스를 넘어서기 위한 공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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