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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고듣고쓰고
오늘 읽는 부분은 이 소설에 대한 문학평론가의 해설이다. 여기선 특별히 각 작품별로 등장인물의 분신에 대한 전문가적인 설명을 읽어볼 수 있었는데, 이제껏 읽어왔던 작품들에서 만났던 등장인물들의 전반적인 구도 및 핵심 주제들에 대한 기억을 다시금 떠올려볼 수 있었다.

이에 관해 이야기를 좀 더 보태자면, 등장인물들에게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은 작품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유발된 고통은 하나같이 등장인물의 정신이나 육신의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평론가는 이 악영향을 우울증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하는데, 이 소설집을 쭉 읽어왔던 나도 평론가의 설명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독자인 나에게 각각의 캐릭터들이 작품속에서 느꼈던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우울감, 분노, 좌절 등과 같은 키워드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작품 속에 나오는 여러가지 상황들이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위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평론가의 해설은 이러한 감정을 전문가적인 시선으로 날카롭게 분석하여 나같은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문학작품 감상의 깊이를 보다더 심도있게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해설을 통해 작품을 바라보는 시야가 좀 더 넓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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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 메시지 중에 살기 위해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있었는데, 얼핏 보면 역설적인 표현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잘 생각해본다면 이것이 결코 역설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과거 이순신 장군이 말했던 것으로 유명한 ‘사즉생 생즉사‘(죽고자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라는 말이 생각났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말이지만 그냥 흘려듣고 넘기는 경우들이 많을 법한 말이기도 한데, 오늘 독서를 계기로 이 말의 의미를 다시금 제대로 곱씹어볼 수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메시지가 누군가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를 가로막으려하는 장애물들에 굴복하고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들을 부수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그것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애도가 지나쳐 잃어버린 대상을 자기 안에 ‘부재하는 현존‘으로, 마치 유령인 듯 합체한 우울증의 다양한 변주- P318
애도의 대상을 자기 안에 가두는 일은 우울증적 주체가 형성되는 첫 단계이다. 자아의 일부로서 대상을 보유하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자아란 곧 ‘상실된 타자‘라는 역설이 주체 내부에 성립된다.- P318
우울증은 자아가 타자의 상실을 타자와의 합치를 통해 만회함으로써 상실을 거부하고 대상을 보존하는 방법인 셈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주체가 누군가를 자아의 분신이자 거울로 인식한다면, 게다가 그 ‘누군가‘가 우울증적 주체를 형성하는 트라우마의 구체적 외현으로 나타난다면, 주체는 자신의 ‘애도의 과함(지나침)‘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P318
가족의 상실에 대한 오랜 애도 작업을 그만 끝내야 한다는,
그래야만 남은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는- P319
우울의 정체, 즉 애도의 과함- P319
『여수의 사랑』에 반복되는 분신의 구조화는, 그러므로, 우울증적 주체가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을 목도함으로써 비록 불투명하고 의심스러울지라도 치유의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제시해보려는 자기 인식의 능동적 장치라 할 수 있다.- P319
『여수의 사랑』은 각각의 개인이 치유하기 힘든 마음의 병을 안고 각자의 ‘여수(麗水)‘를 향해 느릿느릿, 그러나 마치 주어진 운명의 수락을 조용히 거부하는 수난자처럼 자기 몫의 고통을 지고 회귀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들이 앓는 병이야말로 삶에의 의지를 대신 표현하는지 모른다.- P320
‘질병으로의 도피‘는 자아를 위협하는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최선의 방어책이기도 하다. 이들의 병은 생을 파멸로 이끄는 죽음 충동의 소산이 아니라 자기를 파괴시킬지도 모르는 정신적 압박을 이겨내고자 의식과 무의식이 한판 싸움을 벌여 자아 내부에서 힘겹게 조율된 결과물이다. 그러니 ‘여수(旅愁)‘의 인물들은 죽고자 아픈 이들이 아니라 살고자 아픈 이들이다.- P320
"자신의 내부에서 솟구치는 속력"은 의식의 부면으로 솟구치는 상처의 속력이자 상처에 지배받길 원치 않는 욕망의 속력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가리켜 삶의 욕동이자 에로스적 충동이라 했을 것이다.- P320
『여수의 사랑』이 시간의 풍화 작용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튼튼히 살아남을 것임을 확신하는 까닭은 삶의 대립쌍이 죽음이고, 죽음 곁에 있는 삶이란 사랑의 상실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짐 지는 일이며, 상처는 죽음을 동반하는 ‘되태어나기‘를 강요하기에 가장 두려운 적이자 장애물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되삶‘의 가치란 인간을 ‘인간‘으로 살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심원하고 도저한 정신의 층위에서 성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P321
흠 있는 영혼들, 상처받은 영혼들은 살기 위해 때로 죽어야 한다. 그것이 존재를 위협하는 죽음으로부터, 엄혹한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P321
이 길뿐일까, 하는 끈질긴 의문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난다. 되돌아 나가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왔다고, 꺼질 듯 말 듯한 빛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자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안도감이 찾아왔었다.- P322
물에 빠진 사람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썼고, 거품을 뿜으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보았다,-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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