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는 부분은 ‘질주‘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이다. 이 제목은 소설 속 주인공인 인규라는 인물이 달리기를 할 때 쾌감을 느낀다는 소설 속 설정에 근거하여 지어진 제목인듯 보인다. 왜 그런지는 뒤를 더 읽어봐야겠지만 말이다. 이와는 별개로 여기 나오는 인규라는 인물은 손톱이 으스러질정도로 주먹을 꽉 쥐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는 인규의 아픈 가정사(史) 때문이었다.
인규에게는 다섯살 터울의 진규라는 친동생이 있었는데,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동생이 또래 친구들 여러명에게 집단구타를 당해 그만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에 앞서 인규의 친아버지는 무슨 영문인지 농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한다.
이러한 비극으로 인해 인규의 어머니는 얼마후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는데, 보통 이런 경우 기존에 있던 자식(인규)과 새 아빠(의붓아버지) 간의 관계가 좋기는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실제로 이 소설 속에서도 인규는 사회생활을 할 나이가 되자 집에서 나와 회사에서 제공하는 독신자 숙소로 들어간다.
소설 속 인규의 가정사가 얼추 이렇다보니 인규는 마음 속에 복수심과 원망, 분노 등과 같은 감정이 내재해 있을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던 것이다.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인규는 어느날 친동생 진규를 구타했던 아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름대로 계획을 세운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가장 약해보였던 아이부터 시작해 가장 쎄보이는 아이까지 한 명 한 명씩 복수를 해나간다. 인규는 모든 복수가 끝나고 난 뒤 끝났다는 후련함도 느꼈지만 어느순간부턴가 점점 비정해져가고 있었다. 단지 몇마디 말로 표현하기는 힘든 복합적인 고통의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인규는 살다보면 언젠가는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올 수밖에 없을 거라고 자신을 위로한다. 처음 밑줄친 문장이 인규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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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에 이어서 나오는 작품은 ‘진달래 능선‘이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이었다. 여기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정환‘이라는 인물은 어딘가 모르게 위에서 언급한 인규라는 캐릭터와 일부 비슷한 구석이 있어보였다. 열악한 가정 환경에 대한 불만으로 어린 시절 집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다. 수많은 고생 끝에 정환은 다시 자신이 살던 고향의 가족들을 찾아나서기로 하는데, 그 과정 역시 결코 만만치 않다. 하지만 정환은 희망의 끈을 쉽게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모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을 끝까지 붙들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안타까운 건 그 희망의 끈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정환의 태도가 점점 더 정환의 육신을 지치게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이 소설에는 이러한 정환의 태도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한 사람이 나오는데 바로 정환에게 세를 준 집주인 황씨라는 사람이다. 이 황씨라는 사람도 정환과는 약간 다른 종류이긴 하지만 마음아픈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황씨에게는 아내와 딸 그리고 아들이 있었는데 딸이 심장병을 앓고 있었고 어느날 아내는 성한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다고 한다. 황씨는 아내와 아들을 찾기 위해 노력도 해보았지만 그 사이 딸의 심장병이 위급해졌고 이로인해 병원 치료비로 재산을 다 까먹었다고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병원비는 병원비대로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딸을 살려내지는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후 황씨는 지독한 절망에 빠졌다고 한다.
독자인 나는 정환과 황씨의 태도를 자연스럽게 비교하면서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 두 사람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지극히 대비된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약간의 결이 다를 수는 있겠으나 둘 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한 쪽은 어떻게든 희망을 보려 애쓰지만 다른 한 쪽은 체념에 가까운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인다.
개인적으로 예전에 읽었던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비록 삶이라는 것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고통을 가급적 마주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살다보면 고통의 순간을 피할 수 없는 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때 그 시간을 견뎌 나가기 위해 가져야할 바람직한 태도는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힘들지만 어떻게든 희망을 보려는 정환같은 태도일까 아니면 그냥 에라 모르겠다하고 모든 것을 체념하는 황씨의 태도일까. 물론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는다는 건 비록 육신의 고통은 있겠지만 정신적으로는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절망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비록 육신은 편할지 모르지만 정신 건강에는 썩 좋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정환과 황씨의 태도를 나름대로 비교해보았는데, 여기서 누군가가 나에게 둘 중 어떤 태도를 선택할지를 물어본다면 난 정환의 태도를 선택할 것 같다. 사람이 마음이 편하면 몸이 좀 힘들어도 그 육신의 고통을 인내해나갈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 즉 육신은 편하지만 마음이 힘든 것은 정말 견디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위말하는, 사람이 정신적으로 미쳐버리는 상황이 되면 이거는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금 느낀다. 정신이 건강해야 진짜 건강한 거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육신의 건강이 어느정도 기본적으로 받쳐준다는 전제하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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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나오는 내용을 좀 더 읽다보니 황씨의 행동을 재평가할만한 지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황씨가 정환에게 하는 말 중에 자신이 나뭇가지를 태우는 것은 너무 일찍 세상과 작별한 딸이 있는 곳으로 나뭇가지를 보내기 위한 행동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면서 딸이 있는 곳에 나뭇가지가 자라고 꽃이 피는 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이 여기서 나뭇가지를 태우고 있다고 말한다.
독자인 나는 처음엔 황씨의 행동이 그냥 심한 좌절감으로 인한 아무 의미없는 행동인줄로만 생각했는데, 황씨의 말을 통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은 것이다. 다만 황씨도 일종의 정신승리(?)를 위한 행동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보였다. 재평가 과정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내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정신이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정신력이 좋다면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간에 그것을 견뎌내고 이겨낼 힘을 줄 거라는 어떤 믿음(?)이 생겼다.
새벽을 기다리는 일 외에 그가 할 일은 없었다. 덫에 걸리지 않았다 해도 언젠가는 그 새벽을 만날 것이 아닌가? 인규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뿐이었다.- P221
그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달릴 때뿐이었다.
그때만은 별들의 운행이 그의 귀에만 거대한 음향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피부를 뚫고 나가 바깥 공기와 섞여 춤추는 기분이었다. 오로지 그때에만 인규의 영혼은 자신의 가련한 몸뚱이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몸뚱이는 인규의 어린 시절 동구 밖 공터에 버려져 있었던 진규의 몸뚱이와 같았다.- P222
"걷다 보면 끝난다, 걷다 보면 이 길은 끝난다"- P222
어머니는 이십 년 동안 인규가 쌓아온 성벽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그동안 진규는 오로지 인규만의 것이었다. 인규는 일곱 살에 죽은 진규를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이었다. 진규를 사랑했으며 진규로 인하여 고통받은 단 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를 기억하는 자들의 마음속에만 서식한다는 말이 맞다면, 진규는 인규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죽어질 영혼이었다. 그때에야말로 진규의 죽음은 완연해질 것이었다.- P224
그런데 어머니가, 진규를 거적때기에 싸고 봉분도 없이 묻은 어머니가 다시 진규를 부르고 있었다.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진규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던 어머니였다.
"다시 너를 낳고 싶다 진규야!"
빗소리가 인규의 귓속을 할퀴었다. 어머니가 빗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다시 너를 낳고 싶구나, 돌아오겠느냐? 나에게 돌아오겠느냐?"- P224
파고드는, 파고드는 이 손톱 하나 어쩌지 못한다.- P225
인규는 고개를 떨구고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인생은 그의 상처난 손바닥 안에 있었다. 그의 운명도 그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P225
인규는 병동 로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친 발이 자꾸만 허공을 헛디뎠다. 공기가 춤추었다. 숨이 차오기 시작했다.- P226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마음과 그렇다고 체념할 수도 없다는 마음 사이에서 그의 육신과 영혼은 찢기고 있었다.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찾아서 무엇 할 것인가. 하지만 그들이 아니라면 지금 나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P244
그것은 꿈이었다고, 그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한갓 꿈이었다고 생각하려 정환은 애썼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진이 있었다. 그들이 살아 있었음을,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 어딘가에서 숨 쉬고 밥 먹고 잠자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그것이 있는 한 정환은 완전한 체념을 할 수 없었다.- P245
정환은 그동안 자신의 앙상한 희망을 혹사했다. 곰이나 원숭이 같은 짐승들을 먹이지 않고 채찍으로 다스리는 곡예사처럼 정환은 자신의 희망을 함부로 다루고 소모했다. 한데 이상한 것은 그것이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P245
정환의 지친 육체를 괴롭히는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무작정의 희망이었다. 의지나 가능성과는 무관한 성질의 감정이었다.- P245
바람기 많은 사내가 아무 여인에게나 넋을 잃듯이 정환은 시시각각 그 원시적이고도 지긋지긋한 희망에 사로잡혔다.
바람만 불어도 다시 희망이요, 날이 풀려도 다시 희망이었다. 거리에서 큰 소리로 웃으며 걸어가는 가족들을 볼 때도 희망이었고 정임이 또래의 처녀들이 떼 지어 몰려가는 것을 보아도 희망이었다. 새들이 전신주 사이로 날아올라도 희망이요, 아이들이 공터에서 뛰어놀아도 희망이었다. 찾고 싶다, 난 그들을 찾고 싶다. 정환은 도처에서 자신의 희망을 유혹하는 끈질긴 목소리를 들었다.- P246
그는 쉬고 싶었다. 약봉지를 털어 넣을 때마다 정량의 체념을 함께 복용했던 것은 그것만이 자신의 무모하고 무기력한 회망을 잠재워줄 것임을, 그리하여 병을 쾌차시켜줄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P246
우거진 진달래나무들을 바라볼 때마다 정환은 막연한 향수와 기쁨을 느끼곤 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곧 봄이 오리라는 생각, 봄이 와서 이 마당에도 붉은 꽃들이 만발하리라는 단순한 충만감이었다.- P247
"......보기 좋잖소."
그랬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관목들은 놀랄 만큼 선명한 불길 속에서 서로서로를 간절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P248
"곧 봄이 됩니다. 꽃이 필 텐데요."
"…...그러니까 태우는 거요."- P248
울어라.
정환은 고개를 떨군 황씨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목젖까지 치민 욕설을 삼켰다.
흐느껴라, 어젯밤처럼, 그 언제나처럼.- P248
"병신, 이 병신아, 그만 처먹어."- P249
"......그렇게 나무를 좋아했었는데……"- P249
이 문, 이 문의 건너편에서 한 사내가 혼자 밥 먹고 잠을 자고 술을 마시고 흐느껴 울었다.
그렇게 기대어 있자니 정환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것은 정환의 고학 시절 연구실에 숨어 자기 위해 안에서 문을 잠갔을 때 그 투명한 금속성의 소리가 적요하고 싸늘한 실내를 울리던 느낌과 흡사했다.- P252
"한없이 넓고 황량한 벌판에, 나무 한 그루 없는 곳에 그 아이가 서 있소. 한마디 말도 없이 말이오... 하긴 살았을 때도말은 많이 하지 못했지, 숨이 차서, 늘 짧고 간단하게 말해야만 했다오."- P259
"난 이렇게 불태워진 것들이 그 애의 마당에 옮겨 심어질거라고 믿고 있는 거요. 이제 이것이 내가 가진 마지막 나무인데, 그 아이 섰는 한없이 넓은 땅에 꽃이 피고, 물이 흐르려면 아직도 멀었소......"- P260
불길이 진달래 가지의 끝에 이르자 무수한 불티들이 어둠을 거슬러 올랐다. 그 어둠 저편에서 진달래 관목들이 붉은 봄빛을 내뿜으며 능선을 이루고 있었다.- P260
동식은 순간순간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누구의 부축 없이도 걷고 싶었으며 월급봉투를 받아 귀가하고 싶었다. 출퇴근 만원 버스에 시달리고 싶었다. 상사들의 호통을 듣고 저녁이면 술자리에 앉아 그들을 헐뜯고 싶었다. 여자와 함께 살고 싶었고 자식을 낳고 싶었다. 제때 예방주사를 맞힌 자식들이 자라 조막손으로 만든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두 발을 땅 깊이 묻기를 원했다. 그곳에 물을 주어 잎을 틔우기를 원했다. 그 울창해진 그늘에 백발의 어머니가 편안히 눕기를 원했다.- P297
그는 실존적 죽음에 따른 정서적 여파보다 각각의 청춘에 추상적 관념이 아닌 육체적 사건으로 닥친 ‘상징적 죽음‘의 개별적 과정과 낱낱의 사정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는 자들의 사연을 소설화한다.- P309
죽음에 감염된 삶, 혹은 삶에 이미 죽음이 내재된 형국은「여수의 사랑」이 제각각 죽음의 사연을 내포하고 있다는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것은 해결의 기미가 없는 심각한 정신적 외상으로 인물들에게 잠재해 있다.- P309
목숨은 끊기지 않은 채 죽음을 거느리고 살아야 하는 영혼의 황폐함이 어떤 삶의 형태를 낳는가- P309
죽음은 억압된 트라우마이고, 이 트라우마가 지금 어떻게 귀환하는가가 서사의 중심을 이룬다. 음울한 베일처럼 서사의 배면에 죽음의 파문이 드리워져 있고, 인물이 앓고 있는 다양한 신경증은 서사의 전면을 차지한다.- P310
죽음이 삶에 미치는 영향력, 그 무소불위의 힘을 이야기하려 한다면, 그것은 역사와 사회, 민족과 민중이라는 추상의 이름 아래서가 아니라 개인을 만들어내는 뿌리의 구체를 파고드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P312
가족이 개인을 사회의 상징적 질서로 진입시키는 출발지이자 사회화를 위한 훈련 장소라 할 때, 죽음의 사유가 가족에게서 촉발된다는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하나는 죽음의 외상 때문에 정상적으로 상징계 내부로 편입하기 힘들다는 점 ...(중략)...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어려움이 새로운 목숨을 얻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initiation로 작용하여 현실 부적응 상태의 자아를 주체화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P312
가족의 죽음은 정신의 병을 초래하는 씨앗이자 역으로 자아에게 ‘되태어나기‘를 요구하고 활성화하는 촉매제이다.- P312
어머니의 자궁을 뚫고 나오는 생물학적 출생이 사람으로 태어나는 단 한 차례의 사건은 아니며,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일‘ ‘새 목숨으로 살아가는 일‘이 때때로 발생할뿐더러, 이를 위해서는 "그때마다 다시 죽어야" 하고 그 같은 죽음의 되풀이가 "막막하고 두려워져서" "입술 안쪽을 떡니로 악물"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이는 상징적 죽음에 이어 도래하는 ‘상징적 재탄생‘에 대한 작가 편의 서술이자 자기 성찰적인 의미 부여라 할 수 있다.- P313
이 소설집은 ‘되삶‘을 위해 죽음의 회귀라는 힘든 입사식을 치르는 젊은이들의 내면 풍경을 그린 (무)의식의 드라마라 할 수 있다.- P313
죽음의 집요한 귀환은 역설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통증을 수반하는 ‘삶‘의 일환이자 지난한 여정으로 인식된다.- P314
‘새 목숨‘에의 바람은 막연한 관념이기 쉽다. 불투명하고 추상적일수록, 생각만의 희구란 편안하고 수월한 해답이다. 그것이 관념의 위안과 유희가 되지 않으려면, 말로만 강조되는 상식과 거짓된 전망이 되지 않으려면, ‘삶‘은 죽음을 경유해야 한다. 더구나 그 결과가 삶의 긍정이나 행복의 가능성을 열어주지도 않으며, 주체는 난치의 병에 포박되거나 더 심각한 지경에 처할 수도 있다. ‘여수(麗水/旅愁)‘의 인물들은 그래서 아프고, 괴롭다. 그들은 주체의 재탄생을 위해 ‘다시 죽어야‘ 하는, 아니 ‘다시 죽고‘ 있는 스스로를 애도하는 중이다. 이들이 우울한 세번째 이유이다.- P314
‘되삶‘의 방법으로 죽음의 필연적인 경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P314
대체로 분신 모티프는 자아의 또 다른 인격화로서 의식(자아)의 분열을 전경화하는 소설적 장치로 나타난다.- P315
분신의 출현 혹은 설정은 개인의 실존이 매우 불안정할뿐더러 개성을 확신하고 강조하는 순간에도 자기 분열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음을 예견하고 암시한다. 그것은 인간이 이 세계에 ‘있음being‘만으로 존재론적 확실성을 얻을 수 없다는 경고이며, 의식과 무의식, 욕망과 실행, 구체적 현실과 관념적 꿈 사이의 간극을 실체화하는 방법이다.- P315
분신의 등장은 주체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결핍 가운데 찢겨져 있음을, 그로 인해 주체의 존립이 내적으로 붕괴될 여지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무의식이 의식을 향해 알리는 긴급 신호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분신의 테마는 자주 환상의 형식을 취하고 이중적 담화의 형태를 띤다.- P315
자기 내면을 장악하고 있는 어두운 상처의 인격화, 즉 트라우마의 외면화에 가깝다.- P316
주체의 자기 대면은 단독자로서의 순수한 자기 응시일 수 없으며, 자아 찾기의 여정에는 ‘타자‘라는 불순물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 ‘나 아닌 것‘의 시선에 노출되는 상황에서만 비로소 타자를 매개로 한 자기 응시가 개시된다는 것- P316
타자의 응시가 억압된 것의 귀환을 촉발하는 상황은 주체에겐 내면의 병을 더욱 심화시키는 사태가 될 수도 있다.- P317
억압된 것이 타자로부터, 타자를 통해 되돌아오는 과정이란
‘나‘에게 큰 고통이기에 타자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심정적 여유를 갖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타자에 대한 윤리를 말하기 이전에 주체는 우선 자신에 내재된 결핍의 흔적을 인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주체의 정신적 생존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한 권고와 메시지가 이러한 분신 테마에는 자리하고 있다.- P317
무엇보다 ‘여수‘의 주인공들은 우울한 주체들이다. 우울의주체란 애도를 과하게 수행 중인 주체이다.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은 자연스럽게 슬픔을 유발하지만, 그 슬픔이 지나쳐 애도를 적절한 시점에 종결짓지 못하면, 상실된 대상은 무의식적인 것이 되고 애도는 주체의 자기 비하로 돌아서게 된다. 자아의 빈곤, 즉 계속적인 자기 비난이 주체 내부에서 심화되고, 해소되지 못한 슬픔의 침전물은 어느덧 자아의 일부가 된다.- P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