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강 작가가 쓴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다. 뭐라고 정확히 말은 못하겠는데 중력처럼 이끌리는 무언가가 있다.
오늘 읽기 시작하는 이 작품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거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흰‘ 대상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살펴보고, 여기에 더해 독자인 나만의 느낌까지 곁들여 읽어나가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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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흰 도시‘라는 소제목을 가진 챕터를 만났다. 이 도시는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무자비하게 파괴했던 도시라고 나오는데, 구체적인 지명이 나와있지 않아서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세계사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한 편이라 이번 기회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 바르샤바가 히틀러의 표적이 된 이유는 나치에 저항하여 한 때 독일군을 몰아냈던 이력 때문이었다. 히틀러의 악랄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근데 이 파괴된 도시가 왜 이 ‘흰‘이라는 소설에 등장한건지 개인적으로는 조금 의아했다. 좀 더 읽다보니 저자가 과거 미군 항공기가 촬영했던 이 도시의 영상을 본 적이 있었는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 봤을 때 마치 눈이 쌓인 것처럼 보였던게 발단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근데 좀 더 가까이 내려가서 보니 당시 잔혹하게 파괴된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후에 이 도시에 일부분 남은 잔재들과 새로 복원한 것들이 약간은 부자연스럽게 이어져있는 걸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 듯 보인다. 이 챕터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도시와 비슷하게 부자연스러운 운명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흰 어떤 대상에서 시작하여 사고思考의 흐름이 끊임없이 확장되는 게 참 신기하고도 놀라웠다. ‘인간의 상상력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 ‘그 끝이 있기는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 글이었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P9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P10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울 때가 있다. 몸이 아플 때 특히 그렇다.- P11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간다.- P11
난 아무것도 아끼지 않아. 내가 사는 곳, 매일 여닫는 문, 빌어먹을 내 삶을 아끼지 않아.- P14
얼룩이 지더라도, 흰 얼룩이 더러운 얼룩보단 낫겠지.- P14
움직이는 단단한 섬처럼 행인들 사이를 통과해 나아갈 때, 때로 나의 육체가 어떤 감옥처럼 느껴진다. 내가 겪어온 삶의 모든 기억들이, 그 기억들과 분리해낼 수 없는 내 모국어와 함께 고립되고 봉인된 것처럼 느껴진다.- P23
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생해진다. 압도하듯 무거워진다. 지난 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내부 한가운데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P24
아니, 저것을 희다고 할 수 있을까? 검게 젖은 어둠을 차가운 입자마다 머금고, 이승과 저승 사이를 소리 없이 일렁이는 저 거대한 물의 움직임을?- P24
이렇게 짙게 안개가 낀 새벽, 이 도시의 유령들은 무엇을 할까.
숨죽여 기다렸던 안개 속으로 소리 없이 걸어나와 산책을 할까.
목소리까지 하얗게 표백해주는 저 물의 입자들 틈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모국어로 인사를 나눌까. 말없이 고개를 흔들거나 끄덕이기만 할까.- P25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P29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희어 보인다.
어렴풋한 빛이 어둠 속으로 새어들어올 때, 그리 희지 않던 것들까지도 창백하게 빛을 발한다.- P30
어둑한 방에 누워 추위를 느끼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 P32
해독할 수 없는 사랑과 고통의 목소리를 향해, 희끗한 빛과 체온이 있는 쪽을 향해, 어둠 속에서 나도 그렇게 눈을 뜨고 바라봤던 건지도 모른다.- P33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P39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P55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P55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 P66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P66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덥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P67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사람이다.- P74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P74
흰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 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 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ㅡ그것이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 두 그루인 걸까?- P75
마치 인생 자체가 그녀의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반복해서 아팠다. 그녀가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는 힘이 바로 자신의 몸속에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마다 주춤거리며 그녀가 길을 잃었던 시간을 모두 합하면 얼마가 될까?- P76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P77
배가 너무 작아서 약간의 파도에도 세차게 흔들렸다.- P80
수천의 은빛 점들이 먼 바다에서부터 밀려와 배 아래를 지나갔다. 단박에 그녀는 무서운 것도 잊어버리고, 압도하는 그 반짝임들이 세차게 움직여가는 쪽을 멍하게 바라봤다.
......멸치떼가 지나갔다야.- P80
사람들은 왜 은과 금,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광물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걸까? 일설에 의하면 물의 반짝임이 옛 인간들에게 생명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P82
빛나는 물은 깨끗한 물이다. 마실 수 있는ㅡ생명을 주는ㅡ물만이 투명하다. 사막을, 숲을, 더러운 늪지대를 무리지어 헤매다가 멀리서 하얗게 반짝이는 수면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느낀 건 찌르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생명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P82
복사뼈와 무릎뼈. 쇄골과 늑골. 가슴뼈와 빗장뼈. 인간이 살과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다행으로 느껴졌다.- P84
그리고 그녀는 자주 잊었다.
자신의 몸이 (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부스러져왔으며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끈질기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P85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꼭 그때.
젊음도 육체도 없이.
열망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
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 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아 있을 때.- P86
아무런 고통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있다.
방금 울었거나 곧 울게 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처럼.
영원을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되었던 시간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P89
묵은 고통은 아직 다 오므라들지 않았고 새로운 고통은 아직 다 벌어지지 않았다. 완전한 빛이나 완전한 어둠이 되지 않은 하루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일렁거린다. 반추할 수 없는 건 미래의 기억뿐이다.- P90
무정형의 빛이 그녀의 현재 앞에, 그녀가 모르는 원소들로 가득찬 기체와 같은 무엇으로 어른거리고 있다.- P90
저 해저 같은 어둠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내려갈 것인지, 이 빛의 섬에서 더 버틸 것인지.- P91
회복될 때마다 그녀는 삶에 대해 서늘한 마음을 품게 되곤했다. 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약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 밤마다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이마에 입 맞춰주던 이가 다시 한번 그녀를 얼어붙은 집밖으로 내쫓은 것 같은, 그 냉정한 속내를 한 번 더 뼈저리게 깨달은 것 같은 마음.- P92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 그 얼굴 뒤에 끈질기게 어른거리고 있다- P92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P93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P93
조금 더 이대로 있어달라고.
아직 내가 다 씻기지 못했다고.- P97
더 나아가고 싶은가.
그럴 가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라고 떨면서 스스로에게 답했던 때가 있었다.
이제 어떤 대답도 유보한 채 그녀는 걷는다. 살풍경함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절반쯤 얼어 있는 그 늪가를 벗어난다.- P101
만일 삶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사이 그녀는 굽이진 모퉁이를 돌아간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문득 뒤돌아본다 해도 그동안 자신이 겪은 어떤 것도 한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그 길은 눈이나 서리 대신 연하고 끈덕진 연둣빛 봄풀들로 덮여 있을지도 모른다.- P103
문득 팔락이며 날아가는 흰나비가 그녀의 눈길을 잡아채고, 떨며 번민하는 혼 같은 그 날갯짓을 따라 그녀가 몇 걸음 더 나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제야 주변의 모든 나무들이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 되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숨막히는 낯선 향기를 뿜고 있다는 사실을, 더 무성해지기 위해 위로, 허공으로, 밝은 쪽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P103
이 도시의 사람들이 그 벽 앞에 초를 밝히고 꽃을 바치는 것이 넋들을 위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가능한 한 오래 애도를 연장하려 하는 것이다.- P104
부서지지 않았다고 믿으면 더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P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