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chloe 2025/08/0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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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 이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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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0) - 2025-07-17
: 19,051
책 제목에서 이시봉 대신 우리집 반려견 이름을 넣어도 어색하지 않다. 꼭 맞는 옷을 입힌 기분이다. 명랑한 강아지들-그밖의 무수한 털친구들-은 짧고 투쟁 없이 산다. 우리가 모두 헤아릴 수 없는 매순간을 다만 진실 되게 산다. 책 두께만큼 담긴 의미들이 묵직해서 책속 문장들을 몇번이고 다시 읽었다.
초반에 배치된 비숑 이시봉의 길고양이 구조 사건은 한편의 생생한 활극이다. 순식간에 독자들을 매료시키고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목이 졸린 길고양이의 엉덩이를 콧잔등으로 받쳐 구하는 강아지라니! 인간의 눈으로 보자면 이것은 인간의 잔혹성을 해체시키는, 명랑한 강아지 이시봉의 숭고한 활약이다. 하지만 강아지 이시봉은 그저 고양이의 엉덩이에서 냄새를 맡고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은 보호자 이시습과 반려견 이시봉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욕망과 투쟁의 역사를 여러 갈래로 엮는다. 가깝게는 이시봉을 입양한 시습의 아버지 이야기부터, 멀게는 스페인 왕가 역사와 이시봉의 혈통과 관련한 프랑스 유학생들의 이야기가 교묘하게 얽혀 있다. 다층적인 서사는 쉽사리 다음 전개를 예상할 수 없게 하고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하다.
분명 개와 인간의 우정 내지 사랑이라고 확신했는데, 아니, 그건 “인간의 오해”이자 “오독”이고 그나마 그 오독에서 비롯된 개를 향한 감동과 이해가 인간이 가진 “유일한 장점”이라고 하니 순간 멍해진다.(p.469)
그러나 작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노조활동, 검머외가 이끄는 사모펀드 운용회사, 개농장, 길고양이 학대, 가정폭력 등등 너절한 인간들의 면면을 보여주고 이 연결고리마다 강아지 이시봉 혹은 이시봉의 부모견 등이 등장한다. 이때 이시봉은 변함없이 이시봉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따라 그 의미는 다르다. 우리집 막내, 교통사고의 원인, 우수한 혈통의 비숑 등. 소설은 전반적으로 유쾌한 재치를 잃지 않으면서도 윤리적 책임에 대해서 끊임없이 묻는다.
하지만 이 무수한 사건의 우연이 겹치고 또 겹쳐서 결국 다시 보호자 이시습은 반려견 이시봉과 기꺼이 함께 산다. 이것은 사랑이 아닐 수 없고, 그것은 서로가 반드시 서로의 모든 것을 알아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각자의 언어로 완벽하게 읽어낼 수 없어도 다만 명랑하게.
#도서제공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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