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노년이란 나이가 들어 늙을 때, 또는 늙은 나이를 뜻하는 말로 이 책은 늙은 나이에 대한 사상사가 아니라 늙음에 대한 사상사를 다루므로 노년의 사상사보다는 늙음의 사상사라는 말을 인지하며 읽었습니다. 노년을 늙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도록 하므로 늙음을 나이듦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이 든다는 것을 곧 늙는다는 것으로 동일시 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늙음과 유사한 말로 노화가 있으나 이는 나이 들어가면서 발생하는 정상적인 변화를 뜻합니다.
“늙음을 수치스러운 비밀처럼 여기고, 그런 걸 입에 담는 자체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만연합니다. 이 책은 각 시대의 정치·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노년은 무엇으로 정의되었는지 살핍니다. 책은 근대이전과 이후의 시대별로 나누고 보부아르, 수메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발자크, 디킨스 등 여러 사상가들의 노년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각기 저마다 노년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았으며, 그 이유와 근거는 무엇이었는지도 고찰해 볼 수 있습니다.
“큰일은 체력이나 민첩함, 신체의 기민함이 아니라, 계획과 권위, 현명한 성숙함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노년은 이러한 자질들이 사라지기는커녕, 도리어 그 반대로 가장 풍부하게 갖추어지는 시기다.”---p.126 노년에 대한 불평과 반론 중 키케로의 말

몽테뉴는 나이를 먹고 경험을 많이 쌓는다고 저절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공감이 갔습니다.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지식과 경험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한 활력, 신속함, 단호함과 같은 것, 좀 더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들은 퇴색하고 무기력해진다고 말합니다. 노년을 찬양하면서도 풍자한 고대와는 달리 몽테뉴는 노년을 멸시하지도 찬양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는 점입니다. 반면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는 작품 속 노인을 “왼쪽 눈썹 위에 붉은 점을 가지고 태어나기에 쉽게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붉은 점은 노년기에 검은색으로 변합니다. 스트럴드브러그들은 80세가 되기 전까지는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80세가 되면 법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탐욕이 노령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결과로 이어지고 관리능력이 부족하여 결국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잔혹하게 그렸습니다. 노인은 멸시와 미움의 대상이라는 말에 놀랐습니다.
노년’이 사상과 문화, 예술, 정치, 사회 등의 영역에서 어떻게 다뤄지고 그려져 왔는지 검토한 책!
“탈현대를 통해 노동에서 해방된다거나 창조적 일탈이 가능해진다는 것도 적어도 현재의 한국에서는 픽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의 노인은 노동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노동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대부분 비참하기에 창조적 일탈 따위는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동양의 통일체적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은 봉건사회의 이데올로기로서 현대에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로 악용되었습니다. -본문 중에서-
누구나 젊은 시절을 그리워 하며 회상합니다. 지금은 더 이상 젊었을 때의 활동을 할 수 없음을 크나큰 상실로 여기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책의 마지막에는 문정희, 박완서, 김훈등 현대 우리나라의 노년 모습도 이야기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과 사회로 들어갔습니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7퍼센트나 된다고 합니다. 저출산 고령화는 우리나라의 큰 숙제입니다. 이 책은 나이가 들면 늙는게 당연하니 늙음을 조금도 불편해하지 말자는 말로 이야기는 마무리 됩니다. 롱사르의 ‘쇠약’, 키케로의 ‘정신적 성숙’ 넘어 도연명, 정약용, 톨스토이가 따르는 ‘제3의 노년관’을 가져야 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노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자연스러운 노년을 지지하며 그것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