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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없는 북진통일론과 반공포로 석방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승만과 워커 장군)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인민군의 진격도 신속했지만, 전쟁 초기 인민군의 진격 속도만큼이나 미군의 군사개입 또한 매우 신속했다. 지난번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 파트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승만은 전쟁 초기 도망치기 바빴으며, 미국의 즉각적인 군사개입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영토 90%가 인민군이 점령하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됐었다. 그러나 그 시기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워커라인 즉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면서 인민군 또한 길게 진격하지 못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UN군이라는 이름하에 총 15개국을 전쟁에 끌어들였고, 영국, 프랑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터키, 태국, 필리핀 등이 이 전쟁에 군대를 보냈다.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면서 전세는 인민군 쪽에게 불리해졌지만,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를 내세운 마오쩌둥(Mao Ze Dong)의 중국군대가 참전하면서 북진했던 연합국은 다시 후퇴하여 1951년 1월 4일엔 수도 서울이 인민군과 중공군에게 함락 당했다. 이렇게 되자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는 1951년 4월 중국공산당 영토인 만주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 및 핵폭격 그리고 국공내전 당시 대만으로 피신한 장제스 군대의 반격을 주장했다. 만약 맥아더의 말대로 만주에 핵공격이 가해졌다면 만주와 한반도 지역의 방사능 피해는 이루 해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스탈린의 참전으로 인한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한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 의해 해임됐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활약했던 매슈 리지웨이(Matthew Ridgway)가 임명됐다.

 

1951년 봄에서 여름 사이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우선 맥아더가 해임되고 리지웨이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하지만 전쟁초기부터 미국이 군사적인 목적을 가지고 해오던 폭격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계속됐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폭탄은 네이팜 폭탄을 합쳐 20만 톤 안팎이었지만, 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폭격하기 위해 사용된 폭탄개수는 네이팜 폭탄을 포함하여 66만 7000톤이나 달했다. 당시 이승만은 미공군이 한국전쟁에서 감행한 폭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미국 전투기가 적의 주요시설을 강타하고 대단히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미국 전투기가 중요하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이승만의 이러한 발언에는 미군 전투기가 행하고 있던 폭격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고려나 비판의식이 1%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미국은 주로 북한을 타켓으로 폭격을 감행했지만, 남한땅 안에서도 비인간적인 폭격을 감행했었다. 따라서 이승만에게 있어 미국의 폭격 학살은 그저 공산주의자들을 약화시키고 섬멸하는 자유를 위한 반공성전의 위대한 과정이었다. 1951년 휴전회담이 진행되자 이승만은 휴전회담을 결사반대하고 나섰다. 여기서도 이승만이 주장한 것은 바로 그의 정복주의적 비전인 북진통일론이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계속 주장하면서 휴전회담을 주선하는 미국과 북한ㆍ중국 측에 강력히 반발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외치던 북진통일처럼 휴전회담 과정에서도 그가 외친 북진통일은 정치적 허세 혹은 무의미한 정치적 구호였다.

(북진통일 시위,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부터 물러날 때까지 항상 북진통일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승만은 휴전문제 그 자체를 문제 삼았었다. 그리고 그가 외치는 북진통일론을 국민들로 하여금 구호로 외치게 했다. 1952년 부산을 비롯하여 광주, 대구, 대전, 서울에서 학생들이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는 이승만이 미국으로부터 휴전회담 압박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정한 대가를 받아내려는 그의 정치적인 계산도 있었다. 조성훈의 책 <왜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반대했을까>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승만은 아무런 성과 없이 휴전이 성립되면,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그의 정치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휴전회담은 거의 2년을 끌었다. 휴전회담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논의된 사항은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비무장지대 설치 즉 군사분계선의 설정 문제였고, 두 번째는 양측에 대한 휴전감시기관 설치 문제였으며, 세 번째는 양측의 포로교환 문제였다. 이중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내지는 대치했던 문제가 바로 양측 포로문제였다. 우선 세계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포로에 대한 보호를 우선시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 쪽은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남쪽과 북쪽 그리고 중국과 대만으로 갈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했고, 북한과 중국측은 모든 포로가 그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맞섰다. 따라서 양측의 회담이 난항에 빠졌던 것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친공포로들, 한국전쟁 당시 남한에 있던 포로수용소는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나뉘었다. 이 사진에서 스탈린 초상화를 들고있는 친공포로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남한에는 인민군 및 중공군 포로가 거의 13만 2474명이 있었고, 북한에는 한국군 및 유엔군 포로 1만 1559명이 있었다. 북한측에 잡힌 포로들의 경우 인민군 측이나 중공군 측의 포로 학대 및 고문이 있었다는 일부 증언을 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큰 반발 없이 지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적어도 북한에 있던 포로수용소의 경우 국군이나 유엔군 포로가 편이 갈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측 포로의 대우에 대해선 아직 연구가 많이 되지 않은 편이라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것도 있겠지만, 북한에 있던 수용소의 경우 포로들이 모여 체육대회도 하는 화기애애한 모습이 서방측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던 것을 보면, 적어도 남한 내의 포로수용소하고는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에 있던 포로수용소의 경우 포로들 끼리 편이 갈려 죽고 죽이는 일이 반복됐다. 남한 내에 최대 포로수용소 시설인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소위 북측을 따르는 친공포로와 북측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반공포로로 나뉘었다. 반공포로의 경우 전쟁 초기 인민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인민군이 되었다 다시 국군의 포로가 된 사례로 북한과 인민군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결국 유엔측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그들을 분리해서 수용했지만, 이들끼리의 싸움은 끊이질 않았으며, 양측은 서로에 대한 반감만 생겨갔다.

(석방된 반공포로들, 수용소에는 소위 인민군과 북한체제를 싫어하는 반공포로들이 있었다. 이승만은 이들을 휴전회담을 막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휴전회담은 양측 포로문제로 중단되기도 했었다. 이러는 도중 휴전회담을 좀 더 앞당긴 사건이 일어났다. 1953년 3월 5일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 사망한 것이다. 스탈린이 사망하자 포로교환이 이루어지면서 휴전회담이 재개됐고, 포로 송환협정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휴전회담에 반대하여 이 회담에 찬물을 끼얹었는데, 그게 바로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마산, 대구, 영천, 논산, 부산 등 7개 수용소에 갇혀 있던 3만 7000명의 반공포로 중 2만 7000명을 석방시켰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한국 측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휴전협정 파기를 위해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라며 엄포를 놓았다. 이것은 결국 국제적인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분노한 북한 측은 포로들의 재수용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휴전회담 당시 사진, 휴전회담은 2년을 끌었다. 회담을 2년이나 끝 이유에는 양측 포로문제가 항상 있었다.)


(휴전협정에 조인한 각국 대표자들의 서명, 당연히 여기에 이승만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다.)

 

이승만이 반공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하면서 휴전회담이 진행되지 않을 뻔했지만, 결국 휴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유엔군수석대표 해리슨 중장과 공산군 측 대표 남일(南日) 사이에 3통의 휴전협정서와 부속협정서에 각각 서명한 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김일성 북한군총사령관, 중국의용군사령관 팽덕회가 각각 자신들의 후방사령부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하면서 3년 1개월간 지속되던 한국전쟁도 끝이 났다. 당연히 이승만은 휴전회담에는 서명하지 않았기에 휴전회담도 미국과 북한만 한 것이 됐다. 거기다 전쟁 초기 이승만은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을 미국에게 넘겼기에 한국의 작전권은 현재 미국이 가지고 있는 상황에 놓여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국은 소련과 중국의 팽창을 막고 한국ㆍ일본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를 목적으로 1953년 10월 1일 수도 워싱턴에서 한국 측 전권위원 변영태와 미국 측 전권위원 델러스 사이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전문과 6조로 된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식, 사진속에는 이승만도 보인다.)

 

① 한ㆍ미 양국은 국제평화와 정의를 위협하는 무력행사를 삼갈 것을 약속한다.

② 양국 중 어느 1국이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의 위협을 받을 때는 양국이 상호 협의하여 외침을 방지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

③ 양국은 자국의 영토 및 자국의 영토를 위태롭게 하는 태평양지구에 있어서의 무력적 외침에 대처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

④ 양국은 상호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ㆍ해ㆍ공군을 대한민국 영토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에 대해 대한민국은 이를 허용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⑤ 이 조약은 양국이 각각 자국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비준한다.

⑥ 이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며, 어느 1국이 이 조약을 폐기할 의사가 있을 때는 그 의사를 상대국에 통고한 지 1년 후라야 폐기될 수 있다.

 

이 조약은 궁극적으로 1954년 1월 13일 양국의 국회에서 비준이 이루어지면서 발효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이 미국과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현재까지 대한민국 영토에는 주한미군이라는 형태로 미군이 주둔하게 된 것이다. 일각에서는 주한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숭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어쨌든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는 명분은 소위 양국 공동의 적인 북한에 맞서 군사력으로 견제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반공주의적인 시각에 근거한 것이고, 이런 시각의 근본은 바로 이승만식의 반공사상에 있다.

(윤금이, 1992년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던 윤금이는 주한미군 병사에 의해 아주 잔혹하게 살해됐다. 당시 주한미군 병사가 저지른 폭력은 올해 이슈가 됐던 N번방을 능가했다.)

 

또한 주한미군이 주둔함으로써 대한민국 내에서 일어나는 미군문제는 이루 해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대표적으로 1992년에 일어났던 ‘윤금이 피살 사건’을 들 수 있다. 당시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던 술집 종업원 윤금이는 주한미군 소속 케네스 마클 이병에게 살해당했는데, 사망 원인은 콜라병으로 맞은 얼굴의 함몰 및 그로 인한 과다 출혈이었지만, 살해된 시신에는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 힘든 폭행이 저질러졌으며, 소위 N번방 사건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그랬지만 이런 범죄를 저지른 미군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2012년에 한 미군이 저지른 성폭행 사건도 처벌를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평택 코로나 확진자, 2020년 전세계를 강타한 전염병에 가장 무능한 나라는 미국이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에게도 코로나가 퍼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거나 대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2002년엔 소위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라 하여 두명의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의해 압살당한 사건도 일어났다. 이것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즉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이 저지른 범죄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더욱 기가막힌 건 한국정부는 미국이 저지르는 짓에 대해 어떠한 조치조차 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올해 7월 전 세계적으로 강타한 전대미문의 질병인 COVID-19가 미국 전역에 퍼지면서 한국사회에도 피해를 줬다. 미군기지가 있는 평택은 현재 확진자 72.5%가 미군이지만, 한국정부는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주한미군의 이런 악순환적 구도의 뿌리는 바로 1953년 이승만 정부가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이승만 정부가 심어놓은 반공의 뿌리는 주한미군이라는 형태를 남겨 이러한 피해에도 확실한 처벌조차 못하는 구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승만과 응오딘지엠, 1957년 이승만은 남베트남의 지도자 응오딘지엠이 서울을 방문하자 매우 환영해주었다. 둘의 반공성향은 일란성 쌍둥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매우 유사하다. 이승만에게 있어 응오딘지엠은 공산주의에 맞서는 투사였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뒤 이승만 정부는 또 다른 흑역사를 시도했었다.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반공십자군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는데, 미국은 자신들의 우방인 프랑스를 지원하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는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병한 국가였고, 이승만의 입장에서 프랑스가 치르고 있던 전쟁은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이 아닌 공산주의에 맞서는 성전이었다. 1954년 1월 이승만 정부가 자청한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한국군 1개 사단 파병이 미국 정부에 의해 재검토되었는데, 당시 이승만은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 정부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과 동남아시아에서 반공정신의 고취가 파병의 목적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 요청을 미국이 거절하면서 실패했지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에 맞서기만 한다면 식민지 해방 전쟁도 결국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 되는 이승만의 저급한 인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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