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자들이 말뚝이 되어 돌아오는 것은 어떤 종류의 재난인가? 문자를 보낸 서울특별시의 입장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 p.131
도심 한복판에, 우리 집 현관에 말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범한 나무토막 그런게 아니라, 거꾸로 박혀 있는 죽은 사람들. 보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지는 이상한 말뚝. 심지어 광화문 광장 말뚝들 곁으로 사람들은 울기 위해 모인다. 말뚝들은 이미 죽었음에도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기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책은 알 수 없는 일들의 향연이다. 그러니까 저 말뚝들과 주인공 장이 대체 어떤 연관이 있길래 이렇게 사건들이 나열되나 싶을 정도로 이상하고 동떨어진 일이 (심지어 다소 불행한!) 마구잡이로 일어나는데 너무 웃긴건 보통의 소설이라면 이 사건들이 후에는 하나의 거대한 줄기로 귀결되었겠으나 이 책은 그냥 엉뚱한 채로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게 세상 아닌가. 내게 벌어지는 하루치의 미약한 불행들이 모두가 특정한 인과관계로 인해 필연처럼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물론 이 책에서는 말뚝들의 과거 가운데 장의 행동이 연루되어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장이 겪는 대부분의 불행은 말뚝과는 관계가 없다. 근데 그게 평범한 소시민이자, 때로는 나약해지는 직장인의 삶이지 뭐. 이 엉뚱함과 사건의 불가해함이 이상하게 납득된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 아닐까.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기억할 만한 죽음에 대해 써서 올렸다. 그들 모두에게 잊힐 수 없는 죽음이 말뚝의 모습으로 돌아온 게 분명했다. / p.247
말뚝이 되어 다시 등장한 죽은 이들에 대해서도 생각이 복잡해진다. 그들은 은폐된 죽음의 대상이며, 사회적으로 죽임당한 사람들이다. 유독성 물질때문에 죽은 외국인 노동자나 제대로 휴식하지 못하고 일하다 죽은 택배 노동자... 여기까지만 말해도 우리는 수많은 비슷한 죽음들을 쉬이 연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 사람들은 분노하고 함께 슬퍼한다. 말뚝들을 보고 엉엉 우는 것 처럼. 누군가는 그 말뚝조차 이용하고, 없애서 은폐하려 하지만 또 누군가는 그것들을 보며 감정을 쏟고 연민하고 이름 잃은 자들을 위해 발벗고 뛰기도 하고. 이런게 사람이고 인간사 아닌가.
결국 묻어두고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슬픔은 어떻게든 돌아오게 되어 있고, 우리가 그들을 위해 울어주고 연민하는 데에서 사회적 변화의 불씨가 피어오르게 된다. 타인을 위해 흘린 눈물이란 곧 그들을 이해하고 어느 정도 공감했다는 거니까. 거기서부터 타인을 위해 발벗고 나서거나, 적어도 같이 옆에 서줄 수 있는 연대가 시작된다. 산 자는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하고, 죽은 자는 산 자의 미래를 돕는다. 즉 이 소설은 같은 사회에 살았거나 살고 있거나 살 예정일 모든 이들에게 유효하게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심지어 엉뚱한 상상력과 발랄한 풍자의 탈을 쓰고 날카롭게 사회의 폐부를 찌르기까지 하는.
+ 그러니까, 한겨레문학상이 또 한겨레문학상 했다는 이야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