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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님의 서재

올해는 이래저래 코로나에 발목 잡힌 한 해로 기록될테지만 이게 또 아주 나쁜 것마는 아니어서 전반으로 울고 웃는 분야가 있는가 보다. 물론 당연 우는 분야가 더 많겠지만 말이다. 그중 의외로 도서 분야야가 웃고 있단다. 그동안은 매년 울상만 지었다고 하는데 올해는 반전의 해로 거기엔 코로나가 효자 노릇을 했다는 것. 사람들이 집에만 있게되니 비로소 책 읽을 마음도 생겼다는 것이다. 특히 오디오북의 약진이 눈에 띈다고.

 

나도 가끔 인터넷 서점에서 맛보기로 들어보곤 했는데 나쁘진 않지만 아직은 구매할 생각은 별로 없다. 나이가 좀 더 들고 책을 보는 게 어려워지면 모를까 현재로선 책이 주는 물성을 더 좋한다. 요즘 책이 얼마나 멋지게 잘 빠졌는가. 하지만 전자책이나 오디오북은 그 느낌을 100% 느낄 수가 없다. 아무리 디자인이 좋아도 덥개 씌운 예쁜 인형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문득 독서의 원형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일설에 따르면 원래 사람들은 책을 소리내어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묵독 즉 소리내지 않고 눈으로만 읽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전에 소리내어 읽은 사람은 놀랐다고 하지 않는가. 솔직히 난 소리내서 읽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 조용히 읽는 묵독이 맞는 것 같다. 요즘의 그런 진화된 형태의 독서 방법에 대해 비판할 생각은 없지만 난 역시 책은 종이책이 아직은 유효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책에 대한 욕심 있는 사람이라면 두꺼운 책에 대한 로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영원한 것 같지는 않다. 나이가 들면들수록 너무 두꺼운 책은 꺼려진다. 눈도 안 좋은데다 손목의 힘이 예전 같지가 않이 부담스러워지는 것이다. 덕분에 손목의 힘이 아직 남아있을 때 사 놓은 두꺼운 책들이 내 방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코로나로 책의 매출이 늘어난다고 하니 알라딘은 '집콕 독서의 도전, 1000쪽(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10883&start=pbanner)이란 기획전을 하고 있는가 보다. 그러다 보니 난 왜 이 코로나 시대에 그동안 쌓아놓은 이 1000쪽 내외의 책을 읽어 볼 생각을 못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안 그래도 본능은 어디 가지 않았을까? <한동일의 공부법>을 읽으니 갑자기 산에라도 오르는 마음으로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 놓은 박종호의 <불멸의 오페라> 1, 2권을 읽겠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래 전 <박종호의 황홀한 여행>을 읽고 감동해 저 두 권의 책이 중고샵에 뜬 것을 보고 냉큼 샀다. 더구나 이 두 권의 책은 절판이다. 솔직히 절판 딱지만 안 붙어 있어도 아무리 싸게 팔아도 사지 않았을 것이다. 그놈의 절판이 뭐라고 살까 말까하다 과감하게 질러버렸는데 아직도 못 읽고 있다. 그게 벌써 4년 전 일이다. 작년 이맘 때 책박스를 집에서 탈출시켰는데 그때도 차마 내보내지 못했다. 책박스 수거하는 아저씨가 열 몇 박스나 되는 책을 날로 먹으려고 하는데 이 책을 어떻게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어디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는데 이 책을 깨우려면 또 들쑤셔야 한다. 

 

 

꿩 대신 닭이라고 마침 인연이 있으려니 모처에서 <도미니언>을 이벤트 한다. 이 책은 기독교가 어떻게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할 수 있는가를 추적한 책으로 무려 800쪽이 넘는다. 이것도 순전히 한동일 교수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 도전한 것 자체는 후회하지는 않는데 정말 읽는 건 좀 고역이다. 하루에 25페이지씩 읽겠다고 했는데 그것 조차도 어떤 땐 지키지 못하는 날도 있다. 이제 겨우 반을 남겼다. 물론 서평 기일 또한 당연히 넘었다. 주최측에겐 좀 미안한 일이지만 늦게라도 완독하고 서평을 올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냥 완독과 상관없이 조만간 올려야 할 것 같다. 더 늦어지면 마음에 부담감이 쌓여 편치않게 되니.   

 

 <한동일의 공부법>을 읽으면서 생각한 건데, 가끔은 뭐 이런 분야를 연구하나 싶을 때가 있다. 그야말로 그거 공부 한다고 인류가 그렇게 크게 바뀔 것 같지 않은 분야 말이다. 한동일 교수만 해도 라틴어를 한국어도 풀이한 사전 같은 걸 누가 본다고 세븐일레븐이란 별명을 들어가며 (아침 7시에서 밤 11시까지 공부한다고 하여) 그 일을 하고 있는지. 나 역시도 그렇다. 까짓 두꺼운 책 좀 안 읽는다고 살아가는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새삼 내가 왜 이러나 싶기도 하다. 그거 아니어도 읽어야 할 책은 쎄고 쎘는데 말이다. 

 

그런데 내가 <도미니언>을 읽으면서 느끼는 건 내가 참 공부 근육이 없구나 하는 거였다. 사람의 육체의 근육은 25세를 깃점으로 매년 얼마씩 감소한다던데 내가 학교를 졸업한 세월이 얼마며 그나마 학원 조차도 안 다닌 세월이 얼만가. 그동안 나의 공부 근육은 퇴화될 때로 퇴화되었다. 물론 난 지금까지 책을 손에서 놓은 책이 없는데 알고보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고만고만한 책을 읽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았던 건 아닐까 반성됐다. 한동일 교수는 공부란 몸을 가두고 그냥 하는 힘이라고 했다. 몸을 가둔다. 우리의 몸은 편하고자 하면 한없이 편해질 수 있다. 물론 두꺼운 책을 읽는 것과 공부를 하는 것과는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두꺼운 책을 읽는 건 공부의 각을 잡아 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말인데 최근 읽고 싶은 두꺼운 책을 드디어 찾았다. 이건 정말 그렇게 밖에는 설명을 못하겠는데 그동안은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던 책이다. 그것은 양선희 기자겸 작가의 <여류 삼국지>다. 무려 5권이고 한 권 당 분량이 500페이지가 넘는다. 

 

여류란 단어가 붙어 무슨 시대착오냐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여성 작가가 썼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여류란 그 여류라기 보단 '여류(나余 흐를流)'로 나만의 스타일이란 뜻이란다. 즉 자기만의 스타일로 쓴 삼국지란 뜻이란다. 사실 삼국지는 중국 작가가 본류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이문열, 황석영, 정비석 같은 남성 작가에 의해 쓰여지기도 했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여류가 아닌 작품이 어디있겠는가. 그런데 양선희 작가는 이렇게 여류란 단어를 짖궃게 사용하므로 겸손을 가장한 차별화를 시도하려고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내가 이 책을 기억하기론 여성이 쓴 것도 그렇지만 여성을 위한 삼국지로 잘못 기억하기도 했다. 그렇다기 보단 여성의 관점에서 썼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여성이 보는 삼국지는 다를 수도 있으니. 어쨌든 이게 처음 발간됐을 때 한번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곤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러다 최근 이 양반이 글쓰기에 관한 책을 내면서 다른 책은 뭐가 있나 찾아보다 우연히 발견하고 어찌나 반갑던지.

 

그런데 배포가 좀 큰 것 같긴하다. 여성으로 삼국지를 쓴 것도 그렇지만 최근에 쓴 책도 스스로를 '대기자'라고 했다. 그 대기자가 대기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기자만으로도 바쁠텐데 다른 소설도 계속 써 오기도 했다.

 

아무튼 난 평소에도 집콕족이라 특별한 독서 계획을 세우고 그러진 않았는데 알라딘의  기획전을 보니 별개로 잊고 있었던 책을 찾았겠다 나만의 두꺼운 책으로 <여류 삼국지>에 도전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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