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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긴 하다. 사실 지난봄 나는 무슨 생각에선지 문제의 <젊은 작가상 수상집>을 샀다. 그전부터 가격이 유난히 싸다는 것 외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우연히 이게 한 시적으로 특가로 팔고 기간이 지나고 나면 정가에 판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정가로 바뀌기 전에 서둘러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난 또 평소 버릇대로 앞부분만 읽고 다른 책에 한 눈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김봉곤 작가의 수록작이 문제가 되자 갑자기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읽고 나니 마음이 좀 착잡해졌다. 


 

 

 

 

사실 작가의 작품은 이 책이 처음은 아니다. 먼저 <소설 보다:봄-여름 2018>에서 처음 읽었다. 읽으면서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처음 읽는 작가의 작품이 별로면 다음에 또 읽게 될 확률은 매우 낮다. 그래서 김봉곤 작가는 나와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비판할 생각은 없지만 성적 취향이 같지 않다는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보수적인데 비해 어쨌든 그는 진보적이니. 그런데 이번에 작품을 읽으면서 의외로 그가 좀 달리 보이기도 했다. 전작도 그렇고 이번 작품도 그렇고 그는 아마도 계속 이쪽으로 글을 쓰지 않을까 싶다. 보통 작가들의 그런 태도를 나쁘게 말하면 우려먹는다고 하고, 좋게 말하면 천착이라고 할 것이다. 내가 볼 때 그의 주제는 나와는 맞지 않지만 그런 태도나 사유는 충분히 인정할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먼저 읽었던 작품보다 훨씬 잘 읽혔고, 작가의 성격이 보여서 좋았다. 


그의 작품을 두고 사소설이니 오토 픽션이니 하는데 그건 이제 새삼스럽지 않다. 그런 소설을 쓰는 일련의 작가들이 있다는 걸 나는 적어도 5, 6년쯤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 이 장르를 접했을 때 이것을 소설이라고 봐야 하는 건지 산문이라고 봐야 하는 건지 대충 난감해하기도 했다. 이전에는 주로 자전 소설 또는 자전 에세이로 불리기를 좋아했고, 그것은 일정 정도의 형식미와 시대정신을 반영하기도 했다. 그것이 2000년대 들어오면서 개인의 삶, 취향, 경험이 중요시되면서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오토 픽션도 부각되기 시작한 것 같다. 또 그런 만큼 이전 세대는 사소설은 일본에서 유행했던 만큼 우리나라에서 선 터부시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건 또 요즘 그런 글을 쓰는 작가들조차 그렇게 불리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2015년에 나온 이석원 작가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란 책은 사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데 출판사의 결정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이라 하지 않고 이야기 산문집이라고 했다. 사실 자전 소설이나 자전 에세이라면 인생의 어느 한 시절을 다루거나 인생 전반을 관통하는 그런 것이어야 하는데, 그런 형식은 없고 마치 일주일이나 한 달치 일기 또는 삶의 한 정경을 소설로 자유롭게 쓴 듯한 느낌이다. 그때 난 뭔가 모를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모르긴 해도 이런 식의 글을 쓰는 작가가 많이 나오겠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이런 책은 독자의 관음을 충족시켜주지 않는가.       


그렇게 사소설이 주류를 이루다 보니 작가들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의 사생활 침해가 우려가 되기도 한다. 이건 또 오토 픽션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닐 것이다. 작가가 어떤 소설을 쓰든 인물을 가공하기란 쉽지 않다. 하물며 오토 픽션은 일상의 시시콜콜한 일면을 그리니 더하지 않을까. 문득 오래전에 성석제 작가의 독자와의 만남에 간 기억이 생각난다. 질의응답 시간에 주변 인물을 쓰다 보면 그들로부터 소위 민원이 들어오지 않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시냐고 묻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본인인 줄 잘 모르거나 알아도 대충 웃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고, 드물게 멱살을 잡혀 본 적도 있는데 그럴 땐 출판사가 나서서 대신 해결해 준다며 알듯 모를듯한 대답을 했다. 하긴 그렇게 사람 좋은 모습을 하고 있는 작가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소설에서조차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그리겠는가. 그래도 그런 일이 아주 없지는 않은가 보다.


난 김봉곤 작가의 문제의 소설을 읽기 전에는 침소봉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으니 피해자에게 마음이 기우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읽고 나니 솔직히 무엇이 문제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물론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작가가 좀 더 신중하지 못한 걸 탓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C누나는 작가만 알고 독자는 모른다. 그냥 짐작하기로 작가와 친한 사이인가 보다. 그러니까 그렇게 연애 상담도 하지. 그 정도다. 전후 맥락을 봐도 작가는 C 누나의 말을 잠깐 인용한 수준에서 끝난다. 그런데 소설을 있는 동안 그 일은 일파만파가 됐다.


처음 출판사는 문제가 된 부분을 삭제하면서 다시 책을 발행하겠다 했다. 그러더니 다음엔 아예 작가의 작품을 빼고 발행할 거라고 했다. 또 그러더니 이번엔 작가가 아예 상을 반납했다고도 했다. 이쯤 되면 과연 이럴 사안인가 싶어 소설의 문제의 부분을 다시 한번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 읽어보니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공감이 가긴 했다. 내가 작가의 변호인도 아니니 이건 작가가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 같진 않다고 해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말은 이미 작가 자신이 충분히 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같은 여자면서 참 형광등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용서하시라. 하도 음담패설이 난무한 세상에 살고 있어서 일까 그들의 대화는 음담패설 수준에 끼지도 못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둘만의 사적인 대화라고만 생각했다. 굳이 그렇게 보자면 오히려 작가는 C 누나 보단 그의 어머니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어머니를 부조리한 인물로 묘사하지 않았는가.)  


만일 그게 문제가 된다면 앞서 얘기한 이석원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또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읽은 지 좀 돼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책에서 작가는 어느 이혼녀를 소개팅으로 만나 가까워지기까지의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읽다 보면 얼굴이 붉혀지는 장면도 없지 않은데 작가야 이렇게 쓴다곤 해도 상대는 과연 자신의 이야기가 그렇게 까발려지는데 괜찮을까 아무리 익명이라도 하지만 말이다. 그것에 대해 작가는 생각하고 썼을까 뭐 그런 생각들을 잠시 해 봤다. 지금까지 말이 없는 걸 보면 어떤 식으로든 잘 넘어갔나 보다. 하지만 난 정작 영화 <롤리타>를 보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알다시피 나보코프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으로 어느 소아성애자의 비극적이고도 파괴적 사랑을 그리고 있다. 난 그걸 보면서 새삼 내가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건지 잠시 현깃증이 났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수컷에 의한, 수컷을 위한, 수컷의 이야기라지만 그 화법에 질리고 말았다. 하긴 본격적으로 여성이 화자가 되거나 주인공으로 나온 소설은 2세기가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수컷의 화법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기하급수적으로 드러났다. 아무리 현대 남성 작가가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글을 쓴다고 해도 여성의 감성과 화법을 이해하고, 어느 부분에서 상처를 받는지를 채 헤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세상에 어떤 작품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작품은 없다.


고의든 아니든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상처를 받았다면 용서를 구하는 건 마땅한 일이다. 무엇보다 작가가 수상을 자진 반납했다니 과연 그답다 싶기도 하다. 모르긴 해도 그는 웬만해서 밀면 밀리는 대로 흔들면 흔들리는 대로 순응하지 저항하는 법이 없는 그런 캐릭터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작가 편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 독자나 앞으로도 계속 글을 써야 하는 동료 작가들의 입장에선 쓸 자유 표현의 자유가 침해받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볼멘소리를 듣는 것 같다. 원래 작가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연대할 때는 또 연대하지 않는가. 모르긴 해도 이런 일은 앞으로 더욱 빈번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작가의 설자리는 좁아지고, 이렇게 패가 나눠져서 서로를 비난하고(물론 건전한 토론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상을 반납하고, 책을 다시 찍고 그럴 건가? 또 어찌 보면 이건 편집자의 책임도 없지 않다고 본다. 아무리 오토 픽션이고, 솔직하게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작가라고는 하나 편집자가 제 기능을 발휘해 줬다면 문제가 되지 않거나 축소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말에 의하면 김봉곤 작가도 출판사에서 편집 일도 한다던데 설마 자기 작품을 편집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어쨌든 이번 계기를 통해 문학 종사자들의 고민이 더 깊어질 듯하다. 나는 이쯤에서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문제에 대해 한 예를 들어 보겠다. 그것은 <나의 투쟁>이란 두꺼운 4권짜리 자전소설을 쓴 그 이름도 어려운,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다. 그는 원고를 쓰고 출판하기 전 책에 등장하는 사람을 일일이 찾아가 허락을 받고, 그 과정에서 절교가 선언된 지인도 있었다고 했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과연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나라면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 세상을 작가인 사람과 작가가 아닌 사람으로 나눈다면 그 근거를 무엇에 두겠는가. 작가는 끝까지 써서 마침표를 찍는 사람이고, 작가가 아닌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마침표에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저 수고를 포함시켜야 한다면 당연 그것을 해 낸 사람이 작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작가가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렵고 고달픈 일인가.  


어떤 작가도 자신의 이야기에 등장인물을 나쁜 사람으로 묘사하고 싶은 작가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그 인물의 부조리한 일면을 드러내 줘야 할 때가 있다. 그 과정에서 의식을 했든 못했든 실제 하는 인물이 상처를 받았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나는 지금 김봉곤 작가를 옹호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런 일은 작가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 두서없이 써 봤다. 더불어 작가를 보는 일반인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작가라는 직업이 매력적이기는 하다. 존경도 많이 받고. 하지만 매력적이라고 해서 인품도 훌륭하고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완벽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그러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 그런데 간혹 그렇게 착각하는 것 같다. 그건 아마도 작가가 유일하게 전지적 시점을 구사해서 그런 건 아닌가 싶다. 이건 또 신의 시점이기도 하다는 소리다. 넓은 의미에서 신은 공평하긴 하지만 가끔은 신 조차도 전지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지는 않는다. 그런 것처럼 작가는 완벽할 거란 기대 같은 건 안 했으면 한다.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다. 언젠가 누구라면 알 만한 작가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것도 자조적으로. 작가는 언제든 나쁜 사람이 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말을 하는데 작가는 정말 그냥 되는 건 아니겠구나 싶다. 작가란 그런 것이다. 나는 김봉곤 작가의 필치에서 그가 심지가 굳건한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 모쪼록 미안한 일은 미안한 일이고 작가로서 계속 정진해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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