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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자, 별 하나
  • 동주 다이어리
  • 윤동주 100년 포럼 엮음
  • 14,000원 (30%200)
  • 2020-01-01
  • : 425

엄마의 중학교때 꿈이 시인이었다.

신문사에 응모해서 상도 타고 장학금도 받았는데 할아버지는 왜 남에게 돈을 받냐고 장학금을 거부했다고 한다.

엄마는 경상도 양반집이라고 여자는 별로 공부 안 시켜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공부벌레인 엄마한테 공부하지 말라고 혼났다고 한다.

지금 들으면 너무 뒤떨어지는 생각같다.

집안 남자들은 서울대 법대를 가서 판사가 되고 건설부장관까지 되는 걸 엄마는 지켜 보면서 엄마는 너무 공부가 하고 싶으셨다고 한다.

큰 삼촌 작은 삼촌도 의사라서 나한테 항상 잘난 척을 한다.

엄마는 검정고시를 하고 대학은 신학, 대학원은 사회복지행정학, 박사는 철학을 하셨다.

학교간판도 전부 틀리고 과도 전부 틀리다.

장학금을 타기 위해서였다.

돈을 벌고 일을 하기 위한 공부를 하셔서 나중에는 교수도 하셨는데 잘리고 나서 한동안 힘들어 하시더니 자격증을 10개 넘게 따셨다.

나도 아파서 집에 있는데 엄마 따라서 자격증을 10개 가까이 땄다.

엄마는 평생 책을 읽으시고 일기와 시를 쓰셨다.

나한테 읽어 주셔서 항상 듣기는 하지만 난 시는 잘 모르겠다.

그러다가 난 모지즈할머니 얘기를 들었는데 100살에 국민화가 됐다고 했다.

엄마는 책을 읽다가 시바다도요시라고  일본작가인데 80살이 넘어서 책을 냈다고 하는 걸 읽으셨다.

난  엄마한테 박사과정은 아빠가 학교에서 쫓겨나시면서 엄마의 장학금이 중단이 돼서 어차피 박사공부를 못하니까 문예창작학과에 다시 가보라고 해서 엄마는 시험을 봤고 경력이 좋으니까 전액장학생으로 합격하셨다.

엄마는 평생의 꿈인 시인의 꿈을 지금 이룬다고 하신다.

엄마는 시를 써서 교수님들한테 검사받으러 또 나랑 같이 가자고 하신다.

엄마는 윤동주시인의 시를 읽으면 눈물이 난다고 하는데 난 전혀 안 그렇더라.

대한민국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은 지금까지도 윤동주같다.

이 책은 시와 삽화, 다이어리를 접목해 놓은 책이라서 나같은 무딘 감성의 소유자도 감동을 받을 것 같기도히다.

이 책은 엄마가 등단하시고 나중에 책을 낼 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은 책이다.

그래서 내가 서평을 쓰고 엄마한테 선물하고 싶은 소중한 책이다.










윤동주는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다.

​윤동주의 시는 항상  우리 엄마의 눈시울을 붉힌다고 한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세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도 그렇고 별이 들어가기만 하면 왠지 좋다.

서시는  1941년 11월 20일에 창작되었고 그의 유고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년에 수록 되어 있다.

<서시>는 내용적인 면에서 세연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연은 ‘하늘 ∙부끄럼’, 둘째 연은 ‘바람∙괴로움’ 셋째 연은 ‘별∙사랑’을 중심으로 각각 짜여져 있다.

​첫째 연에서는 하늘의 이미지가 표상하듯이 천상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순결 의지가 드러난다. 바라는 것, 이념적인 것과 실존적인, 한계적인 것 사이의 갈등과 부조화 속에서 오는 부끄러움의 정조가 두드러진다.

​둘째 연에는 대지적 질서 속에서의 삶의 고뇌와 함께 섬세한 감수성의 울림이 드러난다.

​셋째 연에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서의 ‘진실한 마음, 착한마음, 아름다운 마음’을 바탕으로 한 운명애의 정신이 핵심이다.

​특히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결의와 다짐한 험난한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운명과 맞서서 절망을 극복하려는 자기 구원과 사랑에 있어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시> 의 서시인 이 작품은, 시집의 전체적인 내용을 개략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시이며, 존재론적 고뇌를 투명한 서정으로 이끌어 올리으로써 광복 후 혼란한 시대에 방황하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감동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라고  한다.

윤동주 시인은 소문난 책벌레였다.

​가정이 넉넉하기도 했지만 책 읽기를 누구보다 좋아했다.

​윤동주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나 김정우 시인 등의 회상기에서도 말했다.

​윤동주가 홀로 있을 때 얼마나 책에 빠져 있었는지를 설명했다.

​말이 적고 조용한 성품인 윤동주 시인에게 독서는 친구요 사색의 원천이었다.

​소년 윤동주는 소학생 시절 탐독한 잡지는 서울에서 발행하는 <어린이>였다.

​알다시피 이 잡지의 편집자는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다.

이 잡지는 ​그냥 심심풀이 흥미 삼아 보는 잡지는 아니다.


소파 방정환선생은 이 잡지를 통해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고 자라나는 식민지 조선 소년들의 감정, 비애의 실체를 보여주고는, 그럴수록 더욱 분발하자며 은연중에 장차 다가올 미래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사상을 고무하고 부추기는 글들을 많이 실었다.

​방정환 선생은 우리나라 어린이를 위하여 동화집을 많이 번안 했다.

​물론 번역도 했다.

​윤동주가 얼마나 독서를 좋아 했는지는 동생 윤일주 교수의 증언이다.

​윤일주씨는 <윤동주의 생애>라는 또 다른 회상가에서 ”중학시절에 그의 서가에 오랫동안 꽂혀 있던 책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아 있고, 지금도 나에게 보관되어 있는 것은 ⌜정지용시집⌟과 백석 시집⌜사슴⌟필사본 등“이라고 밝혔다.

​소학생 시절 친구 김정우와 당숙 윤영춘의 증언은 윤일주의 회상기 외에도 윤동주 시인의 애독서 목록을 파악할 수 있는 또 다른 증언록이 여럿 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다닐 때, 방학 기간 용정에 돌아와서는, 또 외삼촌 김약연 선생에게서 ⌜시전⌟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 시기<문장> <인문평론>등 간행물을 정기적으로 구독했다.

​교내 잡지인 <문우>에 ⌜자화상⌟⌜새로운 길⌟등 시 작품을 발표하였다.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 발레리, 지이드, 장 콕토 등의 외국 문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시인의 아우 윤일주 씨가 보존한 시인의 유품 중에 42권의 도서가 있다.

​우리는 그 도서 목록에서 시인의 문학 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엿 볼수 있다.

​그것은 정지용, 서정주, 김영랑 등 조선 시인과 프랑시스잠의 시집과 릴케의 시집을 비롯한 여러 시인, 작가의 작품집과 서구 문학 이론서와 같은 다양한 내용의 도서들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3개 국어에 능통한 윤동주는 연희전문 영문과 출신으로 외국어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어는 물론 중국어, 일본어 등 3개국어는 기본이었고, 영어는 대학 전공과목이었다.

​프랑어를 제2국어로 공부를 했다.

​가수 윤형주의 부친으로, 윤동주 시인의 당숙인 윤영춘도 윤동주 시인의 독서 경향을 알려주었다.

​윤동주 시인은 프랑스 시를 좋아한다고 했다.

​프랑시스 잠의 시는 구수해서 좋고, 장 콕토의 시는 염증이 나다가도 그 날씬날씬한 맛이 도리어 매력을 갖게 해서 좋고, 나이두의 시는 조국에 불타는 열성이 좋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윤동주’를 검색하면 2015년을 전후로 해서 언론 매체에 가장 많이 노출된 숭실중학교 동창이라는 4명의 사진이 나온다.

​윤동주 사후 민주화에 몸 바친 재야 운동가 문익환 목사와 장중화, 그리고 군인과 행정 및 정치가로 살다간 정일권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전혀 다른 삶을 산 이들이 중학교 친구로 모여 찍었다는 사진 때문에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인터넷에 떠 있는 기사는 사실이 아니다.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정일권 전 국무총리가 아니라 이영헌 목사이기에 바로 잡혀야 한다.

​이영헌목사는 문익환 목사와 윤동주 시인의 은진중학교 동창으로 숭실중학교에 진학했으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문예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일본 신학대학과 미국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하고 평북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서울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사위가  되어 활발한 목회 활동을 하는 한편 신학대학 등에서 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2005년 향년 87세로 별세하였다.

​일본교토 교외 우지 강의 아마가세 현수교 앞은 1843년 7월 초순 윤동주가 귀국한다는 것을 알게 된 급우들이 송별 모임을 갖고 사진을 찍은 장소로, 이것이 윤동주 시인의 마지막 모습이다.

1945년 3월 6일에 윤동주시인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직한 지 18일만으로 장례식집전은 윤동주시인 친구 문익환 목사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거행했다.

​가족들은 <시인윤동주 묘>라는 묘비를 세웠다.

​일본 교토도시샤대학 캠프스에 있는 윤동주시비, 바로 옆에는 윤동주 시인이 생전 흠모했던 정지용 시비가 있다.

​윤동주시인이 교토도시사대학 유학 시절 하숙했던 다케다 아파트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와 ‘윤동주의 영혼이 머물던 곳’이라는 표지석, 현재 이곳은 일본 조형미술대학이 들어서 있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 까요

종소리 들려오지 않는데

 

휘바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 허락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윤동주 1941년)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골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든가

 

내일이나 모래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윤동주시인1942년)

윤동주 시인은 시대에 아주 휼륭한 문학인이자 언어 천재라고 할 수 있다.

​그 암울한 시절에도 여러나라 언어를 구사하고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을 상상만 해도 놀라운 일이다.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를 예전에도 읽었다.

​여러번 읽어도 언제나 가슴은 찡하다.

그런 윤동주가 있어서 엄마처럼 영원히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도 나오는 것 같다.

이 책은 시를 읽고 다이어리를 쓰고 또 다음날 시를 읽고 다이어리를 계속 쓸 수 있어서 저절로 독서가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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