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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stone님의 서재
  • 달빛이 머문 순간
  • 이디스 워튼
  • 15,120원 (10%840)
  • 2025-10-27
  • : 160
서로 사랑하지만, 뉴욕 상류층의 화려한 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들은, '더좋은 조건이 생기면 이혼한다'는 냉소적인 약속을 하며 결혼한다. 이 계약은 당시 상류층의 가볍고 거래적인 결혼관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가진 돈은 없지만 매력과 사회적 기술을 가진 닉과 수지는 부유한 친구들의 호의에 기대어 유럽을 떠도는 기생적인 삶을 시작한다. - '작품 해설' 중에서 


(사진, 책표지)
1922년에 발표한 이 소설의 작가 이디스 워튼(1862~1937년)은 20세기 초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이자, 퓰리처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 작가이다. 뉴욕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특권적인 환경 속에서 성장했지만, 사회적 지위와 부유함이 여성에게 어떤 구속과 모순을 안겨주는지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관찰했다. 이런 경험은 작품 전반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었다. 
소설은 우리들을 미국과 유럽 사교계로 초대한다. 요즘 말로 '인싸' 또는 '인플루언서'들의 사교 모임 현장이 라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화려한 옷차림, 아름다운 화장, 춤과 술, 그리고 고급 호텔 등 일반인은 도저히 쉽게 근접할 수 없는 공간이자 차별화되는 상류층 인맥들의 모임 장소인 소위 '그들만의 리그'인 셈이다.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거 된다. 주인공 개츠비가 1920년대 미국 상류사회를 풍자한 것처럼, <달빛이 머문 순간> 또한 1920년대 초 미국과 유럽의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제1차 세계전쟁 직후, 급변하는 환경  하에서도 일부 상류층 사람들은 여전히 부와 신분을 기반 삼아 새로운 시대, 즉 풍요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고 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가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사교계의 화려한 무도회와 파티, 그리고 이면에 감춰진 불안과 허무의 모습들이 바로 그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격인 수지와 닉은 이런 상류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어떻게 이들이 이 사회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었을까? 그렇다. 남다른 사교술과 과장된 허세가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이 커플의 결혼도 진정성보다는 보여주기 식인 일종의 계약이었다. 이들은 주변인들의 도움과 결혼 선물로 상류사회의 삶을 유지하지만 결국 한계에 봉착하고, 재정적 압박은 두 사람의 갈등을 유발한다. 그동안은 부자들이 제공하는 집과 물건, 그리고 여행 등도 단지 계약 결혼의 부산물이었을 뿐이다. 과연 이 커플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스토리 속으로 들어가 보자.    
1부(1~12장) 
소설은 남녀 주인공인 닉 랜싱과 수지 브랜치의 허니문 여행으로 시작한다. 달이 그들을 위해 두둥실 떠올랐으니, 바로 그들의 허니문인 셈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낭만과 환희의 무대로 지나치게 유명한 곳이라, 이 커플은 이곳을 선택한 용기를 오히려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행복할 순 없을 거야.” 수지는 나른한 속눈썹 사이로 달빛을 여과시키며 그렇게 생각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늘 수지 브랜치의 혐오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제 수지 랜싱에게는 더욱 위험한 혐오의 대상이 될 터였다. 그녀는 그들을 증오했다. 인류의 타고난 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늘 비위를 맞춰 줘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이중으로 증오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그들 사이에서 보냈기에, 그들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대부분 알고 있었고, 거의 이십 년간의 의존 생활이 낳은 경멸적인 눈으로 그들을 판단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적개심은 단지 사랑의 부드러운 효과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그들로부터 그녀와 닉이 지금까지의 가장 무모한 계획 속에서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어냈다는 사실 때문에 누그러지고 있었다.(11쪽)


랜싱은 값비싼 시가 꽁초를 호수에 던져 버리고, 아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누군가 자신이 이런 모험을 감행할 거라고 예언했다면, 그는 증세가 보이는 즉시 감옥에 가둬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이 모험이 미친 짓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수지는 원래 사치를 사랑했다. 화려한 물건들은 언제나 자신을 아름답게 느끼게 했고, 높은 천장은 그녀에게 당당함을 안겨 주곤 했다. 지금껏 부의 증거들에 눌린 적은 없었다. 그녀는 빗을 내려놓고 두 손에 턱을 괴었다. 그제야 다시 생각났다. 대체 왜 시가를 가져왔던 걸까? 
그녀는 늘 스스로의 양심적 본능을 중시했다. 이성적으로는 자유분방했지만,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일에 대해서는 유난히 집착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스트레피의 시가를 가져온 것이다! 아니, 중요한 건 그 시가를 닉을 위해 가져왔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생활 속 가장 사소한 부분까지 편안하고 즐겁고 호사롭게 만들어 주고 싶은 열망이 그녀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수지는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하지 않았을 비열한 일을, 그를 위해서만큼은 서슴없이 저질렀다. 그런데 닉은 그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했으니, 그녀가 그것을 설명할 길은 영영 없을 터였다.(41쪽) 


(사진, 41쪽)
문제는 미래였다. 결혼 축의금이 다 쓰이고, 할머니의 진주목걸이까지 팔아버린 뒤에는? 결국은 부유한 친구들에게 노골적으로, 아무 조건 없이 얹혀사는 신세, 공인된 '기생충'이 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른 해결책은 없었다. 닉은 사치에서 벗어난 수지의 모습을 도저히 그려낼 수 없었다.
"솔렌트에서 비극적인 요트 사고, 올트링엄 백작과 그의 아들 댐블레 경 익사, 두 시신 모두 수습." 
닉은 수지에게 편지를 쓸 작정이다. 때마침 눈에 띈 신문기사의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이제 옛 친구 스트레퍼드가 거대한 유산의 상속자가 된 것이다. 그동안 가난에 찌들어 지내던 그가 이 사건의 주인공이 된 셈이었다. 단 하루만에 운명의 수레바퀴가 이렇게 돈 것이다. "사랑하는 수지에게", 편지를 써내려갔다. 수지가 원하는 걸 줄 능력이 없는 사람이며, 스트레퍼드가 이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므로 그에게 기회를 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닉은 분노를 안고 떠났지만 그의 글 속엔 단 한 마디의 원망조차 없었다.    


2부(13~24장)
닉이 떠나버린 지 꼭 일주일이었다. 그 동안의 시간 속에서 수지는 오직 고독 속에 구원이 있다고 믿었지만 이제 그녀는 알았다. 그 어떤 것도 준비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자신이 고독을 견딜 수 없는 사람임을.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완전히 혼자였던 적이 없었던 그녀가 이제 어떻게 버틸 수 있단 말인가?

스트레퍼드가 말했다. “우리가 없어도 된다고 착각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를 붙잡고 있는 거야. 습관이지. 편안함, 사치, 여유로운 공기… 무엇보다도 지루함과 단조로움, 구속과 추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 넌 그 힘을 본능적으로 선택했어, 어른이 되기도 전에. 닉도 마찬가지였고. 차이라면 닉은 너보다 조금 일찍 그게 진짜 오래가는 것, 삶의 필수 조건이라는 걸 깨달았다는 점이지.”(162~163쪽)


런던의 고독 속에서 수지는 독립에 대한 갈망은 더 격렬해졌다. 물론 편안함을 전제로 한 독립 말이다. 지독한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 이는 수지에게 늘 저주였지만, 만약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면 축복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애착은 누렇게 빛바랜 빗물 속에 잠긴 초라한 호텔 방 한가운데 희미한 전등을 켜면  어이없이 꺼져버리는 전기 설비 같은 것은 견디기 힘든 혐오로 바꾸어놓았다.  

무엇보다도 스트래퍼드는 그녀와 함께하는 데 익숙했고, 그녀의 관점, 너그러움, 한계를 잘 알고 있었으며, 지루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오히려 자주 즐겁게 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불타는 열정은 아닐지라도, 그런 재료들이야말로 오히려 감정을 오래도록 편안하게 유지시켜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수지는 이미 열대 같은 사랑을 맛봤고, 이제는 좀 더 온화한 날씨를 원했다. 하지만 앞으로 1년 동안 그의 흥미를 유지시키고, 다른 여자들을 막아내며, 그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말로 할 수 없이 우울했다. 그러나 이런 건 차마 그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251~252쪽)


(사진)

3부(25~30장)
니콜라스 랜싱 부부의 두 번째 신혼여행을 위해 역까지 가는 데는 가득 찬 택시 두 대가 필요했다. 첫 번째 택시엔 닉과 수지, 그리고 전 일행의 짐이 실려 있었다. 두 번째 택시에는 풀너 아이들 5명과 도저히 빠질 수 없다며 따라나선 하녀, 그리고 그녀가 돌보는 카나리아 새장과 고양이 한 마리까지 실려 있었다. 막 떠나려는 기차에 간신히 승차할 수 있었다. 
호텔의 불빛은 대부분 꺼져 있었다. 그들은 간신히 3층에 있는, 수지가 간신히 감당할 수 있다고 고른 방애 올랐다. 닉과 수지 두 사람은 나란히 의지에 앉아 한동안 침묵했다. 그 침묵은 너무도 달콤해 닉은 깨드릴 수가 없었다. 기쁨을 충분히 맛보며 그 달콤함에 젖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말을 꺼냈다. 
"오늘 아침 편지에서 좋은 소식이 있었어""여행 중에 크레타에 관한 글 두 편을 썼는데, 그냥 여행 감상문일 뿐이야. 그런데 <뉴리뷰> 편집장이 그걸 받아주고 다른 원고도 부탁했어, 이건 원고료 수표야!""이제 그만, 잘 시간이야"


빗방울이 떨어지는 구름 사이로 달이 잠시 얼굴을 내밀어 그들을 비추다 다시 숨어버렸다. 이렇게 소설은 달로 시작해서 달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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