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87)
이 아이들은 교제를 원하지 않았다. 이들은 유치하고
떠들썩한 모임에 익숙하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이보다 더 단단하게 결속된 가족은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들에게는 아동용 도서가
없었을 것이며,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영국 문학의 유익한 문장들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고 다녔을
것’이다…… 이 집의 하인들은 놀랍도록 총명한 브론테가의
아이들에게 크게 감명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30)
에밀리 브론테는 이때 벌써 우아하고 나긋나긋한 자태가 두드러졌어요. 아버지를 에외하면 가족 중에 에밀리의 키가 제일 컸죠. 샬럿처럼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지만 역시나 언니처럼 꼬불꼬불한 곱슬머리를 부스스하게 방치했어요. 피부색도
언니처럼 색소가 부족한 듯 창백했죠. 에밀리의 눈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어요. 부드럽고 초롱초롱하며 투명한 눈이었죠. 하지만 너무 내서적이어서
사람들 똑바로 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답니다. 눈동자는 때로는 짙은 회색으로, 때로는 짙은 파란색으로 보였어요. 말수는 동반자이자 가장 가까운
공명의 대상이었어요. 다른 누구도 그들 사이에 끼어든 적이 없었던 것처럼요.
(134)
앤과 나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간다면 1874년에
우리는 어떤 모습이고, 무엇을 하고 있고, 어디에 살고 있을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가 되면 나는 쉰일곱 살이 되어 있을 거다. 앤은
쉰다섯이고 브랜웰 오빠는 쉰여덟이고 샬럿 언니는 쉰아홉 살인 그해에 우리 모두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며 이 기록을 마친다.
(175)
에제 씨는 에밀리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위대한 모험가가
됐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매우 논리적이어서 브론테 자매들의
철도 주식을 도맡아 관리했다. 이들은 브랜웰 이모의 유산을 모조리 철도에 투자했다. 샬럿은 1845년 울러 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에밀리는 신문에 철로에 관한 기사나 광고가 나오면 빠뜨리지 않고 꼼꼼히 읽으며 그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습득해 왔어요. 게다가 우리는 도박성 투자를 하지 않고 단순한 추측성 매입이나 매도도 삼가고
있어서 수익을 꽤 올렸답니다.’
(186)
1843년 10월 14일 토요일 아침, 브뤼셀. 1교시
수업. 너무 춥다. 불도 없다. 아빠와 브랜웰과 에밀리와 앤과 태비가 있는 집에 가고 싶다. 외국인들
사이에서 지내는 데 지쳤다. 삶이 음울하다. 이 학교에는
호감을 품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 단 한 명뿐이다. 또 한 명은 장밋빛 설당 과자 같지만 실상은 색분필일
뿐이라는 걸 나는 안다.
(209-210)
목사관 자매들의 일상도 늘 화목하지만은 않았다. 앤이 1846년 5월 11일
월요일 밤에 지은 아래의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시는 훗날
<가정의 평화>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왜 우울한 침묵에 지배당해야 하나
온 집안이 왜 이리 스산한가,
위험도 질병도 고통도 없으며
죽음도 빈곤도 쳐들어오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날 밤처럼
모여 있다, 우리 모두 명랑했고,
희망차고, 아무 걱정 없던 때처럼.
그러나 무언가 사라졌으니……
저마다 파멸의 기쁨을 느끼며
변화를 애도한다-제각기 떨어져.
벽난로에서 불이 타오른다
예전처럼 벌겋게 타오른다,
그런데도 집안은 쓸쓸하다
웃음과 사랑과 평화가 돌아오지 않기에……
(252)
‘우리는 죽은 형제를 보이지 않는 곳에 묻었습니다.’ 샬럿이 1848년 10월 2일, 출판사에 보낸 편지 내용이다.
‘지난주의 우울한 소란이 잠잠히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망자를 애도하듯
그를 추모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남자 형제가 떠난 것은 우리에게 징벌보다는 자비의 빛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브랜웰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누이들의 자랑이자 희망이었지만, 성인이 된 후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그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죠. 옳은 길로 돌아오길 희망하고 기대하고 기다렸지만…… 결국에는 절망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대단한 성공을 거둘 수도 있었던 생명이 이른 나이에 갑작스레 빛을 잃고 종결되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257)
에밀리의 장례식을 치르고 며칠이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 샬럿은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인 동생을 위해 다음과 같은
애도의 시를 써 내려갔다.
내 사랑 그대는 결코 모르겠지
우리가 그대로 인해 겪은
뼈를 깎는 듯한 비통함을,
그리하여 깊은 절망 속에서도
황폐한 고통 속에서도
위안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