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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그런 거야, 친구.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거지. 현재의 사회구조가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든가, 나처럼 자신이 부당한 우위를 누리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기꺼이 누리든가 말이야.”

“아니, 만일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면, 자네는 그 혜택을 기꺼이 누릴 수 없을걸. 적어도 난 그렇게 못할 거야.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잘못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니까.”


(126-127)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걸까? 그녀는 살고 싶은 거야. 어쩌면 나도 그녀와 똑같이 행동했을지도 몰라. 그녀가 모스크바로 날 찾아온 그 끔찍한 시절에 내가 그녀의 말을 들은 것이 과연 잘한 것인지는,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어. 난 그때 남편을 버리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했어야 했어. 어쩌면 난 정말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데도 과연 지금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난 그를 존경하지 않아. 그가 필요할 뿐이야.’ 그녀는 남편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난 그를 견디고 있지. 과연 이것이 더 나은 걸까? 그때 난 아직 사랑을 받을 수 있었어. 내게도 아직은 아름다움이 남아 있었으니까.’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계속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거울을 들어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손가방에는 작은 손거울이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꺼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부와 덜컹덜컹 흔들리는 사무원의 등을 보면서, 그녀는 만약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뒤를 돌아보면 자신이 부끄러울 것 같다고 느껴 거울을 꺼내지 않았다.


(328)

그는 그녀에게 전보다 더 싸늘했다. 마치 그녀에게 굴복한 것을 후회하기라도 하는 듯. 그래서 자기에게 승리를 안겨 준 그 말, 바로 ‘내가 얼마나 절실하게 끔찍한 불행을 느끼는지, 내가 나 자신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라는 그 말을 떠올리며, 그것이 위험한 무기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 두 번 다시 그것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들 사이에 그들을 묶는 사랑과 더불어 모종의 투쟁을 일으키는 사악한 영이 자리 잡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가 그의 마음에서 몰아낼 수 없는,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서는 더더욱 몰아낼 수 없는 사악한 영이……


(329)

사람이 익숙해질 수 없는 환경은 없다. 특히 주위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갈아가는 것을 볼 때는 더욱 그렇다. 석 달 전만 해도 레빈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다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생활, 그것도 자신의 수입을 넘어선 생활을 하면서, 술에 취해(그로서는 클럽에서 있었던 일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한때 아내가 사랑한 남자와 꼴사나운 우정을 나누고, 더욱더 꼴사납게도 타락한 여자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 없는 여자의 집을 찾아가고, 그 여자에게 마음을 뺏겨 아내를 슬프게 한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친 데다 밤에 잠도 못 자고 술까지 마신 탓으로 깊고 편안하게 잤다.


(452)

‘그래, 난 몹시 불안해. 그리고 이성이 인간에게 부여된 것은 인간을 불안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야. 그러니 난 벗어나야 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저 모든 것을 보는 게 끔찍하기만 한데, 촛불을 꺼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어떻게 끄는 거지? 저 차장은 왜 승강용 발판을 뛰어다니는 걸까? 저 객실에 있는 젊은 사람들은 왜 소리를 지르지?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말하고 무엇 때문에 웃는 걸까? 모든 게 진실이 아냐. 모든 게 거짓이고, 모든 게 기만이고, 모든 게 악이야!’


(455-456)

그녀는 성호를 그었다. 십자가를 긋는 친숙한 동작이 그녀의 마음속에 처녀 시절과 어린 시절의 모든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갑자기 눈앞의 모든 것을 뒤덮고 있던 암흑이 찍어지고, 일순간 과거의 모든 눈부신 기쁨과 함께 삶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녀는 다가오는 두 번째 객차의 바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바퀴와 바퀴 사이의 중간 지점이 그녀와 나란히 온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빨간 손가방을 내던지고는 어깨 사이에 머리를 푹 숙인 채 객차 밑으로 몸을 던져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러고는 마치 곧 일어날 자세를 취하려는 듯 경쾌한 동작으로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았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시가 한 짓에 몸서리를 쳤다.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무엇 때문에?’ 그녀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뒤로 젖히려 했다. 하지만 거대하고 가차 없는 무언가가 그녀의 머리를 떠밀고 그녀를 질질 잡아끌고 갔다.’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 그녀는 어떤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왜소한 농부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철로 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불안과 허위와 슬픔과 악으로 가득 찬 책을 읽을 때 그 옆에서 빛을 비추던 촛불 하나가 어느 때보다 밝은 빛으로 확 타오르더니, 이전에 암흑 속에 잠겨 있던 모든 것을 그녀 앞에 비춰 보이고는 탁탁 소리를 내며 점점 흐릿해지다가 영원히 꺼지고 말았다.


(500)

그때는 진리를 알았는데 지금은 잘못 알고 있다니,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그 문제를 차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자마자 모든 것이 산산조각으로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그때 착각을 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의 정신 상태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데다, 그것을 약점 탓이라고 인정해 버리면 그 순간을 더럽히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과 고통스러운 갈등을 겪으며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정신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509)

추론은 그를 의심으로 이끌었고 그로 하여금 무엇을 해야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깨닫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때, 그는 자신의 정신 속에서 두 가지 가능한 행위 가운데 어느 것이 좋은지 어느 것이 나쁜지 판단하는 완전무결한 재판관의 존재를 계속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으면 그 즉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무엇인지, 자기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사는지 인식할 가능성을 전혀 깨닫지도 보지도 못하면서, 그러한 무지 때문에 자살을 두려워할 정도로 괴로워하면서, 그와 동시에 인생에서 자신만의 고유하고 일정한 길을 굳건하게 개척해 가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540)

“그 ‘민중’이란 말이 너무 애매해서 말이야.” 레빈이 말했다.

“읍 서기들, 교사들, 어쩌면 1000명의 농민 가운데 한 명은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지도 몰라. 하지만 미하일리치 같은 나머지 8000만 명은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표명해야 않을 뿐 아니라 무엇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표명해야 하는지 최소한의 개념도 갖고 있지 않아.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권리로 그것을 민중의 의지라고 말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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