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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mile
  • 마르크스 평전
  • 자크 아탈리
  • 18,000원 (10%1,000)
  • 2006-10-09
  • : 589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마르크스에 관한 책을 또 읽었단다. 정작 그가 쓴 저서들은 감히 도전을 하지 못하고, 그에 관한 책들과 해설서들만 읽는구나. 몇 년 전에도 이사야 벌린이 쓴 마르크스 전기를 읽었는데, 이번에 또 마르크스 전기를 읽었단다. 아빠가 예전에 읽은 이사야 벌린이 쓴 마르크스 전기와 이번에 읽은 자크 아탈리가 쓴 마르크스 평전을 서로 비교해 가면서 이야기를 해 주면 참 좋을 텐데, 그런 정리 능력이 없고, 예전에 읽은 이사야 벌린의 책의 내용을 기억하는 것은 둘째치고, 이번에 읽은 자크 아탈리의 책도 벌써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구나.

그냥 자크 아탈리가 쓴 <마크르스 평전>을 읽으면서 긁적여 놓은 메모로 바탕으로 이야기를 해줄게. 책 제목이 그냥 마르크스 평전이 아니라,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단다. 자크 아탈리가 누구지?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데… 공학, 정치학, 경제학 등 다양하게 공부를 하고 경제학 박사가 되었고, 프랑스에서 정치도 하고,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보좌관으로도 일했다고 하는구나. 음.. 프랑스에서는 꽤나 유명한 사람이겠구나. 그런 그가 20세기에 들어서 19세기의 뛰어난 천재 마르크스를 재해석을 하겠다고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란다.


1.

마르크스의 선조들은 대부분은 트리어 지방의 유대인 제사장이었다고 하는구나. 트리어가 지금은 독일 땅이지만, 과거 한때 프랑스 땅이기도 해서, 프랑스와 독일의 스타일이 공존하는 그런 곳이란다. 아무튼 마르크스 선조들은 다들 제사장이었는데, 마르크스의 아버지 하이셸은 변호사가 되고 싶어했단다. 하지만 식구들을 생각해서 유대교를 버리지 못했단다. 유대교를 버리지 못했다는 의미는 변호사를 할 수 없었다는 의미야. 유대교는 직업 제한이 많았는데, 변호사는 할 수 없었거든. 하지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다음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변호사가 되었단다. 단, 유대인들의 변호를 많이 해주었대. 그리고 이름도 하인리히 마르크스로 바꾸고 변호사를 하다 보니 돈도 많이 벌었다고 하는구나.

그런 아버지의 아들로 카를 마르크스가 1818년 태어났단다. 그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마르크스가 그 소설을 좋아했다고 하는구나. 이 평전의 특징 중에 하나는 마르크스의 생애를 이야기하면서, 당시 중요한 역사 사건이나 문학 작품, 예술 작품도 같이 이야기해주는 것이란다. 좀더 이해를 돕기 위함인 것 같은데, 정작 아빠는 그 역사적 사건이나 문학 작품을 거의 모르고 있어서 큰 도움은 안 되었단다. ㅠㅠ

마르크스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고 그를 본받으려고 한단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이웃 아저씨 베스트팔렌 남작에게도 영향을 많이 받는단다. 나중에 베스트팔렌의 딸 예니와 사랑에 빠지고 평생 반려자가 된단다. 마르크스는 1853년 본 대학의 법학 공부를 하게 되는데, 이때 젊은 혈기가 넘쳐서인지 방탕한 생활로 빚을 지기도 했대. 아버지가 그 빚을 다 갚아주었다고 하고… 그 젊은 시절 그는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헤겔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나중에는 헤겔에 대해 비판을 많이 했다고 하는구나. 마르크스가 한때 지지하던 이들도 나중에는 비판과 비난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 때문이 등 진 이들도 많단다.

….

베를린으로 옮겨서 계속 법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변호사였기 때문에 법을 공부한 것 같았어. 하지만, 마르크스가 하고 싶은 공부는 따로 있었단다. 철학. 그는 장문의 편지로 아버지에게 전공을 바꾸고 싶다고 이야기했어. 한참 뒤에 아버지는 오케이를 했단다. 하지만 바로 바꾸지는 않았어. 아버지가 편찮으셨거든. 19세기의 보건 상황은 무척 열악했단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많이 죽고, 젊은 이들도 어느날 갑자기 시름시름 앓다가 죽곤 했어. 마르크스의 아버지도 폐렴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야 마르크스는 철학으로 진로를 바꿨단다. 당시 예니와 약혼 한 사이였는데, 예니는 트리어에 있고, 마르크스는 베를린에 있어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자주 만나지 못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니…

베를린에서 마르크스는 상류층 사람과 교류를 많이 했는데, 이때 베를린에서 군 복무 중인 엥겔스를 처음 만났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더구나. 마크르스와 엥겔스는 실과 바늘보다 더 심한 사이로써, 평생을 함께한 정신적 동지였단다. 1841년 마르크스는 베를린 대학 졸업장을 받고, 그해 4월에 예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단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구나. 논문을 그냥 일기 쓰듯 하는구나.


2.

마르크스는 바우어라는 사람과 함께 퀼른으로 향했단다. 그곳에서 <라인 신문>에 편집장으로 일하게 되는데, 이 <라인 신문>은 진보 성향이 강한 신문이었어. 그렇다 보니 오래 못 가 강제폐간이 되었고, 마르크스도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된단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키워온 예니와 결혼을 하게 되고, 예니는 마르크스 공부를 도와주었어. 그들은 퀼른에서 생활이 어려워지자 당시 망명객들의 도시인 파리로 떠났어. 유럽 각지의 좌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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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그러니까 파리는 제네바, 브뤼셀, 런던과 더불어 중부 유럽 전체, 특히 독일에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망명객들의 피난처였다. 망명객들은 정치적인 검열이나 경찰의 박해를 피해 파리로 온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재단사 빌헬름 바이틀링처럼 스위스를 거쳐 파리로 온 은행가의 아들인 루트비히 베르나이스와 요제프 바이데마이어가 있었고, 당시 유명한 독일 시인이었던 게오르크 헤르베그처럼 프로이센에서 직접 온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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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좀 더 자유롭게 잡지고 만들고, 많은 책들도 보고 많은 철학자들, 사상가들과 교류도 했어. 그리고 딸도 출산하게 되었어. 그는 예니의 몸조리를 위해서 에니를 딸과 함께 고향인 트리어로 보냈단다. 그리고 혼자 남아서 실컷 공부를 했어. 이때 열심히 공부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정립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마르크스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완벽주의자라고 알 수 있단다. 그런 완벽주의 때문에 책을 쓰더라도 제대로 끝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대.

그의 행복한 파리에서 생활도 시간이 갈수록 좌파에 대한 통제가 심해졌어. 결국 벨기에 브뤼셀로 갔단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완전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어. 정치 활동을 안 한다는 조건을 달고 그를 받아주었거든. 하지만, 그는 브뤼셀에서 정치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하였단다. 공산주의자 관련된 모임을 만들고, 열심히 활동했어. 이 즈음이 엥겔스와 함께 일을 시작한 때였어. 트리어에 연락해서 아내 예니와 딸도 오라고 해서 그들은 브뤼셀에서 함께 지냈단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벨기에 내의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영국의 공산주의 단체와 교류하였고,  공산주의자 동맹이라는 연합체를 만들었어. 그 <공산주의자 동맹>의 선언문으로 쓴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이었단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얼마 전에 읽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의 독서편지로 대신할게.


3.

1849년 8월 26일 마르크스와 식구들은 영국에 도착했단다. 영국은 당시 대륙보다 정치적으로 안정했고, 언론의 자유도 어느 정도 보장해 주었어. 그러나 여전히 노동자들은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어. 주 근무 시간이 64시간이나 되었대. 아이들도 이제 셋이나 되었고, 예니는 넷째 아이를 임신했어. 그렇다고 돈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집세마저 없어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 그나마 엥겔스가 집도 좀 갚아주고 생활비도 좀 주고… 마르크스는 잡지를 출간했지만 집안 경제에 도움을 주지는 못했어.

예니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 남동생은 마르크스와 예니의 결혼을 심하게 반대할 정도로 마르크스를 안 좋아했어. 그런 예니의 남동생이 프로이센의 내무장관이 되어서, 영국 정부에 마르크스를 경계하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는구나. 다행히 영국 정부는 그의 편지를 무시했대.

마르크스는 영어를 하지 못했는데, 런던 생활이 길어지면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어. 예니도 아이들 영어 공부에 신경을 썼는데, 아이들 네 살부터 셰익스피어를 외우라고 했대. 오, 무슨 뜻이나 알고 외우라고 시켜야 되는 건 아닌지… 밀린 집세로 결국 더 안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고, 둘째 아들이 죽고 말았단다. 당시 유아 사망률이 높긴 한데, 돈이라도 넉넉히 있었으면 치료라도 할 텐데, 치료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가난이 아이를 죽인 것이니라. 부모로써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음, 이상한 일이 하나 벌어졌어. 하녀로 같이 살고 있던 헬레나가 임신을 한 거야. 그런데 헬레나는 아버지가 누군인지 끝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대. 엥겔스는 자신의 아버지라고 이야기했다가 죽기 전에 사실은 마르크스가 아이 아버지라고 했다는구나. 마르크스는 묵묵부답이었고, 정황상 마르크스가 아이의 아버지였던 것 같구나.

….

힘든 생활을 이어가던 마르크스는 글만 열심히 썼단다. 돈이 되지는 않았어. 그러다가 <뉴욕 데일리 트리뷴>으로부터 기사 제안을 받았어. 고민을 살짝 하긴 했지만, 기고하기로 했어. 얼마만의 고정적인 수입인가. 기사를 쓸 때는 예니와 토론하여 쓰고 악필인 마르크스 대신에 예니가 글을 베껴서 신문사에 보냈다고 하는구나. 이 기고뿐만 아니라 그는 간만에 수임이 어느 정도 생겨서 경제적인 안정을 찾기도 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고, 아이들은 몇이 더 죽었단다.


4.

특별한 직업도 없고, 돈도 없는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대영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었단다. 하루 종일… 그곳에서 책들을 썼어. 하지만 그의 책을 출간해주려고 하는 출판사들이 없었어. 그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거든… 출판사를 찾지 못하다가 독일의 라살이라는 자산가가 책을 내주겠다고 하여 출간한 책이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한 시론>라는 책이란다. 책을 내준다고 하면 원고를 독일까지 보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보내지 못하고 하는구나. 정말 가난했나 보구나. 결국 엥겔스한테 또 부탁을 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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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그 보잘것없는 원고가 끝이 났네. 하지만 보내지를 못했네. 우송을 하고 보험을 들 파딩(1961년에 폐지된 영국 화폐로서 4분의 1 페니에 해당했다-옮긴이)이 없기 때문이지. 그런데 보험은 꼭 들어야 하네. 왜냐하면 다른 복사본이 없거든. 그러니 월요일까지 약간의 돈을 보내주었으면 하네. 부탁하네.”

그러고 나서 그는 후에 아주 유명해진 다음 문장을 냉랭하게 덧붙였다.

“이렇게까지 돈이 없으면서도 돈에 대해 글을 쓴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네! 돈에 관해 쓴 작가들 대부분은 자기들의 연구 주제와 사이좋게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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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아버지와 어렸을 때 깊은 정을 쌓았는데, 일찍 돌아가셨어. 하지만 어머니와는 연을 끊고 살았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마르크스에게 상속될 재산도 어머니가 안 주셨어.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단다. 정말 오랜 만에 고향 트리어에 가서 장례식에 참석했어. 장례식을 마치고 곧바로 런던으로 돌아왔는데, 많은 유산과 함께 왔단다. 갑자기 경제적 여유가 생겨서 그는 큰집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어. 아껴 쓸 만도 한데, 그는 그동안 아이들에게 못해준 것이 미안해서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는구나. 엥겔스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의 아버지는 큰 회사를 가지고 있었어. 그 회사를 고스란히 엥겔스가 물려받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엥겔스도 돈이 많아져서 마르크스에게 보내는 돈도 많아졌지. 이 때가 마르크스 삶에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시절이었던 것 같구나. 마르크스는 예니와 엥겔스가 걱정할 정도로 돈을 많이 썼대.


5.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좌파 세력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모임이 인터내셔널이 생겨나게 되는데, 마르크스는 독일 통신서기장으로 활동하게 된단다. 그리고 그 유명한 <자본론>을 쓰기 시작한단다. 아직 그는 집으로 많은 인사들을 초대해서 교류를 나누었어. <자본론> 1권을 출간했지만 많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그의 유명세는 점점 높아졌고, 그가 이십대에 쓴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이 외국어로 번역되기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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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

마르크스는 목표에 도달한 듯 싶었다. 그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유럽에서는 아직도 코뮌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을 때 마르크스는 갑자기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언론에 의해 절대 권력자로 여겨지면서 그는 유일한 다국적 정치조직의 정상에 자리했고, 그의 이름을 내세운 정당과 비밀집단이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미국, 러시아에서 생겨났다. 코뮌의 마지막 무렵에 쓴 그의 마지막 <인터네셔널에 보내는 담화>는 서방의 모든 언론이 언급했고, 전 세계의 기자들이 그와 인터뷰하려고 몰려들었다. 독일의 수십만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읽은 <공산당 선언>은 이제 프랑스어, 러시아어, 영어로 번역되었고,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자본론>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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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 멤버들은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서 각 나라의 요직에 진출하는 성과를 냈어. 그들의 활동이 넓어지는 것이 오히려 현정권의 반감을 사게 하여, 여러 나라들, 특히 프랑스에서 인터내셔널을 불법으로 규정했단다. 인터내셔널에는 큰 타격이었어. 추방뿐만 아니라 처형당하는 이들도 있었어. 마르크스는 이런 혼란의 시기에 노동자들이 결집하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못했단다. 프랑스를 비롯한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인터내셔널을 불법으로 규정하니 많은 사람들이 영국으로 망명해 봤단다.


6.

마르크스와 예니는 아이를 여섯 명을 낳았으나 셋은 일찍 죽고 딸 셋만 어른까지 성장을 했어. 딸의 이름은 첫째가 예니헨, 둘째는 라우라, 셋째는 엘레아노르였어. 딸들 모두 아버지의 영향으로 커서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단다. 아버지의 일도 도와주고 그랬어. 마르크스를 찾아오는 좌파 청년들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는데, 마르크스의 눈에 차지 않았나 보더구나. 특히 셋째 엘레아노르는 17살 연상이랑 결혼하겠다고 하니 극구 말렸지. 그 남자 또한 사회주의자였지만, 바람둥이로 소문난 사람이었거든. 떼어 놓으려고 별 짓을 다했지만, 엘레아노르는 우울증까지 걸려 자살까지 생각하는 것을 안 마르크스는 마음을 돌렸어. 하지만 예니는 끝까지 반대를 했다고 하는구나. 결국 엘레나오르는 그 남자와 맺어지지 못했다고 하는구나.

….

세월은 흘러 흘러 예니가 죽었어. 평생을 마르크스 뒷바라지를 하면 살았던 예니. 부잣집 딸로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는 가난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의 남편이 되어 평생 가난과 싸우면서도 남편을 끝까지 지지해준, 그이 또한 위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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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4)

몇몇 친지들이 예니를 묘지까지 동반했다. 엥겔스가 추도사를 했다. 라우라와 엘레아노르, 예니헨과 샤를롱게 등과 함께 있던 라파르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독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음에도 그녀의 평등의식은 그 누구보다 철저했다. 그녀에게 사회적인 차이와 구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기 집과 식탁에 노동복 차림의 노동자들을 맞이할 때면, 왕족에게 대할 때와 똑 같은 예의와 배려를 보이며 맞이했다. …… 그녀는 마르크스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고, 극도로 헐벗은 날들에도 자신이 선택한 것을 결코 후회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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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도 이후 오래지 않아 삶을 마감한단다. 엥겔스가 추도사를 썼어. 마르크스의 영원한 친구인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마지막 길도 함께 해주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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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3)

3월 14일 오후 3시 15분,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생각을 멈추었습니다. 그를 혼자 둔 것은 겨우 10분이었는데, 돌아와보니 그는 잠들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안락의자에서 마지막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죽음은 유럽과 미국 프롤레타리아의 투사들을 위해, 그리고 역사과학을 위해 측량할 길 없는 손실입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정신이 떠나면서 남긴 공백을 곧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다윈이 자연 발달에 관한 법칙을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는 인간 발달에 관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 게다가 마르크스는 현재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움직임과 그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부르주아 사회를 이끄는 법칙도 발견했습니다. …… 이 두 발견만으로도 한 사람의 인생으로서는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 둘 중 하나만 이룩한 사람일지라도 행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모든 영역들을 아주 많이 연구했고, 그 모든 영역들 중에서 피상적으로 연구된 것은 하나도 없으며, 하다못해 수학에 대해서까지 그는 발견의 업적을 이룩했습니다. 그는 과학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이룬 업적의 반도 되지 않습니다. 과학은 역사의 원동력, 혁명의 힘이었습니다. 힘들게 예측한 결과를 담은 이론적 법칙을 발견하는 기쁨을 넘어서서 그는 산업에서의 혁명적 변화의 주역이기도 했습니다. …… 왜냐하면 그는 우선 무엇보다도 혁명가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필생의 사명은 자본주의 사회와 그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모든 국가 제도를 무너뜨려서, 현대 프롤레타리아를 해방시키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해방될 수 있는 조건을 처음으로 정의 내린 사람은 마르크스였습니다. 투쟁은 그의 기본 요소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열정적으로, 끈질기게,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는 성공을 거두며 투쟁했습니다. …… 마르크스는 당대에 가장 미움받고 모략을 가장 많이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절대주의 정부들도 공화주의 정부들도 그를 유배시켰습니다. 부르주아들, 보수주의자들 또한 민주주의들이 모두 그에 대항하려고 단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닌 한,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베리아 광산부터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미국에서 수백만 혁명 동지들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눈물 흘리는 가운데 죽었습니다. 그에게 많은 반대파가 있기는 했어도 개인적인 적은 없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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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갔고 그의 많은 글들이 남았단다. 그 글을 정리하는 몫도 엥겔스였어. 워낙 마르크스가 악필이다 보니 그의 글을 제대로 알아보는 이가 몇 안되었거든. 둘째 둘 라우라와 엘레아노르도 아버지의 글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했어. 그렇게 정리해서 <자본론> 2권과 3권을 내놓았대. 정말 엥겔스라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로구나. 마르크스와 함께 하면서 마르크스보다 뛰어나려고 하지 않았고, 늘 그를 지지해주면서 사회주의 운동도 변함없이 했지. 엥겔스만 다른 책을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엥겔스의 추종자들이 엥겔스를 마르크스와 동급으로 올려 놓으려고 했지만, 엥겔스는 그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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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엥겔스 추종자들이 후에 두 사람을 동등한 반열에 올려 놓으려 애썼지만 엥겔스는 자신이 마르크스 천재적인 지적 능력을 타고나지 못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엥겔스가 그토록 싫어한 공장의 사장 역할을 떠맡기 위해 런던을 떠나면서 포기한 것 중에는 저자가 되는 것도 포함되었다. 요컨대 엥겔스의 결단은 자기가 알고 있는 한 유일한 저자인 마르크스에게 돈을 대주기 위해서였다. 자본주의의 요새에서 트로이 목마가 된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자신의 이론적 연구에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마르크스와 함께 토론하기 위해 빈번히 런던에 왔다. 두 사람은 그때부터 거의 매일 편지를 교환했고, 그것은 20년 간 지속되었다. 사상사에서 그와 같은 희생의 예는 찾아보기 어렵고 이후로도 없을 것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 때문에 아무리 힘든 처지에 놓여도 그는 결코 마르크스를 문제 삼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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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딸 엘레아노르가 결국 우울증에 다시 걸려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둘째 딸 라우라마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를 읽고 마음이 많이 아팠단다. 하늘에 있던 마르크스와 예니 또한 많이 아파했겠지.

마르크스는 자신이 죽은 이후 그를 따르려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의 사상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해석하여 권력을 누리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런 이들을 보면 마르크스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빠가 메모를 띄엄띄엄 해서 너희들에게 이야기해준 마르크스의 삶도 띄엄띄엄 같구나. 카를 마르크스는 무엇이 그를 그런 삶을 살게 만들었을까. 평생을 열정을 가지고 공부하고 새로운 사상을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아빠가 그와 같은 두뇌를 가졌더라도 가족들이 눈에 밟혀 그와 같은 삶은 못살았을 것 같구나. 그의 삶은 한번 읽어볼 만한 삶이고, 선택적으로 배워볼 만한 삶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 카를 마르크스의 족보를 죽 거슬러 올라가면, 아버지와 어머니 쪽 모두 유대교 제사장들에 이른다.

책의 끝 문장 : ‘인간은 기대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마르크스는 자기 책과 서류 들을 아무도 정리하지 못하게 했다. 겉보기에는 무질서했지만 실상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으며, 그는 자기가 필요로 하는 책이나 공책을 언제나 힘들이지 않고 찾아냈다. 대화를 하는 가운데도 그는 종종 자기가 막 인용한 글귀나 숫자를 책에서 찾아 보여주려고 말을 멈추곤 했다. 그는 자기 작업실과 일체를 이루었고, 책과 서류는 마치 그의 몸의 일부인 것처럼 복종했다."- P59
마르크스는 머리말을 썼다.
"사고하며 고통받고 있는 인류와 핍박당하며 사고하는 인류는 사고할 줄 모르고 소극적으로 즐기기만 하는 속물들의 동물적 세계에서는 당연히 참을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고하는 인류로 하여금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의식을 갖게 하고 고통받는 인류와 결합할 수 있게 할수록, 자기 뱃속에 품고 있는 결실은 더욱 완벽하게 태어날 것이다."
- P128
"그의 노동은 분리되고, 바깥에 존재하며, 그와 독립하여 낯선 존재가 되며, 하나의 자율적인 힘으로 그에 맞선다. 그가 사물에 투여한 생명은 그에게 맞서며, 적대적이고 낯설게 된다. 노동은 고단함이며, 그의 정신을 황폐화게 만들고 몸에 상해를 입히는 고통이며, 그의 활동은 고뇌처럼 보이고, 그의 생활은 인생의 희생처럼 여겨진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모든 노동은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 P142
마르크스는 엥겔스가 전년도에 나열한 열두 조항을 열 조항으로 압축하고, 역사적 유물론에 관하여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설명을 시도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가 빈곤화로 내몰린 계층, 당시 사람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근본적으로 환상이 없는 계층으로 나타나 있는 최초의 글이 바로 <공산당 선언>이었다. 나이는 서른이 채 안 되었고,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브뤼셀에 망명해 사는 젊은 독일 철학자가 쓴 이 글은 비종교적인 글 가운데 오늘날까지 가장 많이 유포된 글이다.- P196
런던에서는 마르크스의 이중 생활이 계속됐다. 낮에는 공식적으로 인터내셔널의 독일 통신 서기장으로, 유럽 전역의 수십만 노동자와 피고용인, 지식인을 곧 집결시키게 될 정치조직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로 활동했다. 밤에는 20년 전에 시작해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한 시론>이라는 제목으로 아직 1장밖에 출간하지 못한 대작을 집필했다. 그는 <자본론>으로 명명할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공헌할 생각이다.-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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