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전체보기

알라딘

서재
장바구니
여성에게 삶의 ‘핸들‘이 온전하게 주어진 적이 있었던가.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다가온 낯선 이에게 그 ‘핸들‘이라는 것을 여성은 원 없이 빼앗기며 살아왔다. 자신의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빼앗아 얻어낸 것처럼 그들은 슬금슬금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 보이지 않는 슬픔을 감각하며 자꾸만 지는 싸움을 하는 일은 그들 본인에게도, 그리고 실패를 답습하게 될 두려움에 휩싸인 다음 세대의 여성에게도 힘이 들었다. 그러니까 남 탓, 세상 탓을 하며 거기에서 주저앉았다면 일은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 조우리의 소설집은 어려운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들의 강인함은 거창한 목적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그저 거기에 자신의 일상이 있기 때문에,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세상에서 ‘11번 출구‘를 끝끝내 찾아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아무리 조심해도 사고는 일어날 수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건 그저 ˝번갈아 핸들을 잡˝는 것이다. 일상을 성실하게 쌓는 것으로 긴긴 싸움의 두려움을 몰아내는 내적인 강인함은 작가 김금희의 《복자에게》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여성‘이면서 동시에 ‘퀴어‘이고, ‘노동자‘이기도 하다. 잘못한 게 없고 위로받을 일 또한 없는데, 타인에 의해 그들의 위치는 세상 밖으로 고정된다. 안정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공간에서 그들은 ‘펭귄‘처럼 서로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방향을 잃은 분노를 그러안은 사람들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자꾸만 그들에게 욕을 했고, 폭력을 행사했다. 화를 내야 하는 건 그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본인들도 알면서 같은 약자끼리 계급을 나누고 질서를 세우고, 또 차별을 했다. 사람들은 어쩌면 그들을 ‘나사‘쯤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느 철물점에서든 대체물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짐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 개개인은 ‘규격‘에 구애받지 않는 나사다. 그러므로 ˝나사라는 건 너무 많은 곳에 너무 많이 있어서 언제든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 없는 일˝이 흔하게 생겨날 것이다. 하나씩 ‘나사‘를 잃다 보면 지금 이 세계라는 ‘의자‘를 떠받치지 못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사실 ‘나사‘는 ‘여성‘, ‘퀴어‘, 또 ‘노동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단어이다. 보편적으로 통용되지만 혼란스럽기만 한 질서 속에서 ‘나사‘에 불과한 그들은, 또 우리는 늘 ˝말이 돼. 하다 보면 다 돼.˝라는 말을 듣는다. 세상에 말이 안 되는 일은 절대 없고, 우리는 세상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존속시키기 위해 신체적, 혹은 정신적 폭력을 감수한다. 그러던 중 기존의 질서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여성‘으로서, ‘퀴어‘로서, 또 ‘노동자‘로서 자신을 지키려는 결심을 세웠다. 자신을 지키는 일을 통해 그들 모두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손끝에 닿지 않아도 그 존재가 너무도 명확했던 문, 벽, 또는 천장에 균열을 내면서 그들은 물었다: ˝정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 질문을 회피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분명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갈 결심을 세워야만 한다. ˝이곳을 벗어나도 이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 다섯 마리‘가 되어 함께 이 밤을 버텨낼 도리밖에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