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은 '또라이'를 그려내는 데 도통한 작가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던,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 광기,
혹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말이 안 통하고 대책 없는 또라이를 만났을 때 일어나는
그 숨막히는 공포 상황이 그의 전매특허니까.
그냥 '그려내는' 정도가 아니라,
말도 안되는 미친놈의 행동과 정신세계가 납득이 갈 만큼 생생하게 묘사해내는 데
그를 따를 작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더구나 그가 그려낸 미친 놈들은 강도와 종류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하나 비슷한 놈 없이 모두 제각각이다.
톨스토이 식으로 표현하자면,
"무릇 평범한 사람들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또라이들은 저마다 나름의 똘끼를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feat. 안나 카레니나)
그런 전문가가 이번 작 <파인더스 키퍼스>에서도 새롭게 미친 신선한 놈을 데리고 왔다.
도대체가 소설 속 주인공에 푹 빠져서 작가를 해꼬지하고 살인도 불사하려면
얼마나 대단한 독서광이어야 하는지, 얼마나 정신줄을 놓아야 가능할런지,
소설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나로서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지만
킹이 그려놓은 꽃길 아닌 '핏길'을 그대로 따라가다보면
비쩍 마른 빨간머리에 창백한 피부, 핏빛 입술을 가진 미치광이 <모리스 밸러미>의
정신세계와 의식의 흐름을 따라잡는 건 전혀 힘들지 않다.
(특징적인 외양 묘사 때문인가,
스티븐 킹의 소설, 그것(IT)에 등장하는 공포의 광대, 페니 와이즈가 연상된다는.. ㅎㅎ)
오히려 킹의 작품속 광인들은 공포의 대상이 되고, 혐오스러운 면이 있는 한편으로는
대개 깊이 몰입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주인공의 대척점에 있다기보다는
그들 자신이 주인공으로 느껴질 만큼 친근하기까지 하다.
(폭식증에 걸려 아이스크림을 마구 먹어대는 미친 간호사 애니 윌크스('미저리')라던가,
믿음을 잃고 뱀파이어에게 목을 물어 뜯긴 뒤 자기 혐오에 빠진 신부 캘러한 ('살렘스 롯')이라던가,
이 작품의 전작에서 엄마 치맛폭에 싸여 애증으로 갈등하던 메르세데스 킬러 브래디('미스터 메르세데스')라던가 등등)
어쨌든 아주 사소하게 시작된 돌출 행동이,
잠깐의 돌발 사태와 맞물려 예측 불허의 사고를 만들어내고,
그걸 기점으로 '꼭지가 돌아'버리는 불안정한 정신상태가
결국 어떤 식으로 폭주하며 정말 위험한 존재로 변신하는지,
이 노련한 작가는 아주 차곡차곡 단계별로 쉽고 빠르게 묘사하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준다.
우선 돋보이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교차 편집.
이미 알려진 시놉대로,
이 소설은 78년에 유명 작가를 죽인 미치광이가 숨겨놓은 미발표 원고를,
2006년 한 평범한 소년이 우연히 손에 넣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78년과 2006년의 상황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유명 작가 로스스타인을 죽인 범인인 모리스의 행보와,
그로부터 30여년 뒤를 살고 있는 평범한 소년 피트의 행적이 각각 이어지다가,
어느 시점에서 맞물리게 되는 순간,
마치 폭죽이 터지는 것과 같은 스릴을 맛보게 된다.
(그게 참 절묘한 전개라,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 줄 알면서도,
이 소설의 시놉 자체를 몰랐다면 정말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 작가를 죽이고 그의 원고를 훔친 미친 놈,
그리고 30여년 뒤, 그 원고를 손에 넣는 소년이라는 설정이
궁금증을 불러일으켜서 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들긴 했었지만
아예 줄거리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소설을 읽었다면,
과거와 현재의 두 인물이 만나는 접점에서 얼마나 큰 희열을 느꼈을까 싶어 아쉽다.)
처음엔 두 인물의 시공간이,
훔친 원고가 든 가방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마침내 둘이 같은 시공간에 있게 되는 그 순간이 주는 엄청난 긴장감이란?!!
그리고 소설은 킹의 작품답게 롤러코스터를 탄 것 마냥
천천히 속력을 높여 가다가 마침내 두 인물이 만나는 시점부터는
꽁무늬에 불을 붙인 폭탄 처럼 아주 거침없이 내달린다.
개인적인 감상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킹의 작품을 읽을 때면 중반부까지는 인물에 빠져서
그들의 움직임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면
후반부로 가면서는 플롯에 빠져서 어느새 긴장감으로 가슴을 두근거리며 읽고 있더라는...
그 분야에 도통한 전문가가 쓰는 장르 소설도 물론 훌륭하지만,
다른 영역에서 이미 도를 닦은 장인이 새롭게 진출하여
'콜라보' 형식의 기술을 선보이는 탐정 소설은 또 색다른 맛이 있다.
인간사에 숨겨진 구질구질한 진실을 흥미롭게 풀어 보여주는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사랑과 집착', 그 종이 한 장 차이의 무게가 아주 짜릿하게 다가온다.
* 외양 묘사 때문일까?
23세의 모리스로는 <어바웃 타임>에서
주근깨투성이 빨간머리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준 <돔놀 글리슨>이,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0714/pimg_7304001171453894.jpg)
50대의 모리스로는 <짐 캐리>가 떠올랐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0714/pimg_7304001171453895.jpg)
<배트맨 포에퍼>에서 보여줬던, 미치광이 아인슈타인 같은 산발한 머리에,
광기어린 웃음이라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미친놈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는......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0714/pimg_7304001171453896.jpg)
** 잘생기고 똑똑한 흑인 청년 제롬 캐릭터가 꽤 마음에 들긴 하는데,
생각보다 활약이 별로 없어서 늘 아쉽다.
전편에서도 역할이 좀 부족하다 싶었는데
그가 이번 편에서 한 일이라고는,
운전수 노릇과 피트의 어린 여동생 타냐의 우상이 되어
그녀의 마음을 열도록 해 준 것 외에는 그닥...
언젠가는 (빌 호지스 3부작의 완결편이라는 'End of watch'에서는) 좀 나아지려나..
*** 사실, 악인 모리스의 포스가 너무 강해서일까?
탐정 소설을 표방하고 있긴 하지만,
<파인더스 키퍼스> 3인방의 활약이 그닥 눈에 띄지 않아 아쉬웠다.
호지스마저도 사건 해결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내세울 만한 역할은 없었다는...
오히려 사건을 해결해 준 것은 모리스 벨러미 본인의 광기이고 보면
역시 '잘 키운 캐릭터 (특히 나쁜 놈)은 열 사람 몫을 하는 법'이다.
****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는데...
미저리와도 일맥상통하는 결말이라
시원하면서도 좀더 색다른 해결책을 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책 때문에 미친 놈이니 책으로 응징하는게 당연하다 싶지만서도...
***** 공포 유발 지수로만 따진다면 물론 미저리가 한 수 위다.
밀폐된 공간에 미친 사람과 단둘이, 그것도 다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한 채로 앉아서
시원하게 죽여주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사육해주면서,
무조건 자기가 원하는 내용으로 소설을 써 내라고 강요하는 '넘버 원' 팬이라니...
정작 자기가 원하는 결말은 보지도 못하게 될 텐데 앞뒤 안 가리고
한 방에 죽여준 모리스 밸러미는 자비의 천사인가.
****** 영화 같은 묘사와 구성도 킹의 전매특허 중 하나인데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 그 능력은,
전작의 범인 브래디를 묘사할 때 아주 탁월하게 발휘된다.
뇌를 크게 다쳐 죽지는 않았지만 멍청이가 되어 버린 브래디가
갇힌 정신병원의 정경이,
그리고 다음 편을 암시하는 그 장면이 짧고 평범한 듯 하지만 아주 공포스럽다.
짧은 몇 줄의 문장들 만으로 채광, 분위기, 화면의 톤,
그리고 카메라 워크까지 보이는 듯한 멋진 장면을 그려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