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존재의 첫번째 순간!
기진맥진 2025/10/07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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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슬립 소재의 SF를 보면서 뭔가 거슬리지 않은 적은 처음인거 같다. 왠지 그런게 나오면 나는 몰입이 안되더란 말이야.... 내가 뭐 아는게 많아서 논리를 따져서 그런게 아니고 그냥 왠지 그렇더라.... 근데 왜 이 책에선 아무것도 거슬리지 않았을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어서 였을까.
마이클을 비롯한 이 책의 인물들은 1999년을 살아가고 있다. 미래에서 온 리지는 2199년에서 왔다. 200년을 뛰어넘은 시간여행이 이뤄졌으며 독자들은 그 사이(앞시간 쪽에 훨씬 가까운)에서 살아가고 있다.
1999년을 배경으로 선택한 작가의 의도가 탁월한 것 같다. 근데 그 시기 한참 젊은 날을 살았던 내게는 부끄럽게도 그때의 기억이 별로 없다. 육아와 직장생활, 잦은 이사 등으로 그저 눈앞의 것에만 급급해서 살아서였나. 이제 와서 y2k 같은 것을 찾아보니 아 맞다, 그랬었지 하고 어렴풋이 기억이 날 뿐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게 다행이었던 게 아닐까. 작가가 이 시기를 선택한 것은 마이클의 불안한 내면과 관련이 있다. 12살(미국 학제로는 중학생)인 마이클은 이제 몇 달 남은 밀레니엄을 불안해하며 마트에서 통조림을 슬쩍하여 방에 쌓아두는 습관이 생겼다. 양심의 가책은 불안감을 한층 증폭시키지만 행위를 멈추지는 못한다.
마이클 주변의 인물들 + 미래에서 온 여행자 1명이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다.
마이클의 엄마 : 닥치는 대로 일하며 혼자서 마이클을 키우지만 벌이가 신통치 못하다. 얼마 전 마이클이 아팠을 때 결근한 일로 해고된 뒤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들 앞에서는 늘 긍정적 태도를 유지하려 애쓴다.
기비 : 이웃의 고등학생. 시간제로 마이클의 돌보미 일을 한다. 얘네 아빠가 바로 엄마를 해고한 사람인데 비록 푼돈이긴 해도 엄마한테 고용되었다는 설정이 우습지만, 받은 돈 이상으로 마이클에게 정성을 다한다. 이웃이자 친구이자 마이클이 남몰래 좋아하는 첫사랑?이기도 하다.
모슬리 : 아파트 관리인 아저씨. 단순한 주변인인 줄 알았는데 중요한 인물이었다. 느닷없이 감정의 파도와 감동을 몰고 오는 인물.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지만 사실상 우리 주변에 가장 많은, 내 가까운 사람이거나 혹은 나일 수도 있는 캐릭터를 그려낸 게 아닌가 싶다.
리지 : 200년 뒤 세상에서 온 소년. 기비와 같은 나이고 엄마가 과학자. 형제들과 함께 엄마 연구실의 학생이다. (미래의 학교, 가정의 모습을 슬쩍 보여주는 듯하지만 이정도 단면으로는 전체적인 파악은 어렵게... 슬쩍만 보여주는 느낌) 엄마 세이비오 박사가 바로 시간여행 기기(공간 텔레포트) 연구자. 4명의 아들들은 모두 연구소의 천재적 학생들. 하지만 형제들끼리 힐난하고 투닥거리는 건 지금 시대와 똑같음. 그러던 중 리지가 충동적으로 기계조작을 하고 마이클의 시대로 건너옴.
이렇게 된 이야기다. 1999와 2199년이 교차 구성되며 2199 부분은 약간 회색 종이로 구분되어 있는데, 서술이 완전 달라 작가의 센스가 느껴지고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영화로 잘 만들면 무척 재미있겠다.
그러잖아도 y2k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마이클에게 리지의 등장은 큰 기회이다. 더구나 그가 가져온 ‘요약서’라는 책. 그건 말하자면 2199년 시점에서의 역사책이다. 그걸 볼 수만 있다면.... 하지만 리지는 절대 보여주지도 말해주지도 않는다. 최소한의 범위에서 최소한의 행동만 하고 돌아간.... 그랬기에 패러독스가 덜 느껴졌던 건가 싶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작가의 초점이 ‘지금 여기’에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건 제목에서부터 느껴진다. 그 제목이 본문 여러 군데에 나온다.
‘The first state of being’
이 제목을 ‘오늘이 내일을 데려올 거야’로 번역했다. 고심한 제목이라고 느껴지지만 굳이 의역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본문에서는 ‘존재의 첫 번째 순간’이라고 번역했다. 이런 식이다.
『“있잖아.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 집중해.”
“존재의 첫 번째 순간. 우리 엄마가 ‘현재’를 가리키는 말이야. 차를 타고 달리는 지금 이 순간.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 여기는? 이건 첫 번째 순간이야. 가장 중요한 순간, 모든 게 의미있는 순간. 그래서 나는 내가 미래에 벌여 놓은 혼란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 미래, 그건 제3의 순간이야. 미래는 돌아간 다음에 걱정할 거야. 당장은 그냥 지금 여기에 있고 싶어. 너희랑 형편없는 음악을 들으면서.”』 (156~157쪽)
『“그런 건 제3의 순간에 대한 생각이야. 이러면 어쩌지? 저러면 어쩌지? 하는 식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지금을 살아야 해. 그게 첫 번째 순간이야.”
“첫 번째 순간.”
마이클이 웅얼거리자 리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 이곳이 우리 인생 최고의 장소야.”』 (193쪽)
‘존재의 첫 번째 순간’이라는 멋진 말을 해주었다고 해서 리지가 미래에서 온 선지자 같은 존재는 전혀 아니다. 사고를 쳐 스스로도 당황하며 복귀를 시도하는 청소년일 뿐이다. 그건 이쪽과 저쪽 모두의 노력이 필요했는데 그 순조롭지 않은 과정이 독자들의 긴장감을 높인다. 더구나 이시대의 면역을 갖지 못한 리지가 감기에 걸려 아프게 되었을 때는 특히.
사소한 부분도 놓치면 아까울 정도로 잘 짜여진 이 책에서 가장 편하게 웃음지었던 대목은 리지가 가장 가고 싶은 곳으로 ‘쇼핑몰’을 선택하고 그곳에서 이것저것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지는 장면. 하지만 그 장면들에 특히 작가는 많은 메시지를 넣어 놓았다. 이 책은 두 번 정도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독서에서 100% 캐치하기는 어려우니까. 내가 바로 그러한데, 다시 처음부터 읽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정도는 되어야 뉴베리 대상을 받는구나 감탄하면서 읽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받은 작가라니! ‘안녕 우주’를 안 읽은 것을 후회하며 다음 도서관 방문 때 찾아봐야겠다.
번역이 꽤 까다로운 책이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리지가 200년 전 유행어랍시고 배워 온 어설픈 은어나 줄임말들도 다 우리말식으로 바꿔야 했고, 그렇게 눈에 띄는 작업보다도 더 어려운 세밀한 부분들이 많았을 것 같아서. 느낌의 차이를 살려야 할 부분도 많았을 것 같고.
스포가 되겠지만 누구나 생각하는 결말이라 얘기하자면 리지는 결국 무사히 돌아갔고, 현재에는 현재의 사람들만 남았다. 그 ‘요약서’의 행방이 아주 중요한 사건이지만 그것만은 스포 금지.^^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미래를 안다는 것과 미래를 준비(대비)한다는 것은 다르다.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미래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미래는 현재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뿐이다. 번역 제목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구석구석 아주 다양한 메시지가 결국 큰 메시지로 통합되는 책. 그래서 지금 당장 작은 한 발이라도 떼게 되는 책. 그런 책에 큰 점수를 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길게 썼는데도 아직 말하지 못한 것들이 많네.... 그래도 이제 그만 쓰고 명절연휴를 즐기러(테레비 보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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