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할수도 해줄수도 없는 마음의 일들
기진맥진 2025/09/16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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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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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
‘마음과 마음을 잇는 SF 감정 동화’ 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SF 감정 동화라고? 이런 조합은 처음 본다. 새로운 느낌을 예감하며 읽어보았다.
‘SF’와 ‘감정’을 붙여놓은 조합은 처음 보지만 내용은 처음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인간의 행동 방식과 감정을 학습한 휴머노이드.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로봇. 이런 주인공이 나오는 어떤 작품은 섬뜩하며 무서웠고, 어떤 작품은 절절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 감정에 함께 젖어든 적도 있지만 이제는 거의 그러지 않을 것 같다. 기술의 발전이 워낙 눈부시다보니 그런 세상이 금방 올 것처럼 느껴지지만, 내 생각엔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아는 것이 부족해서 논리적으로 이유를 대진 못하겠다. 다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더 넓게 얘기하자면 생명이 그렇게 쉽게 대체되지는 않을 거라는 느낌적인 확신? 아니면 너무나 원치 않는 세상에 대한 거부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이 책에는 4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첫 번째 [감정사전]에 인공지능을 가진 휴머노이드가 등장한다. 새로 개발된 ‘희망이’는 어린이들의 행동과 감정을 세밀하게 배우기 위해 정우네 교실에 전학생처럼 들어오게 되었다. 학급 아이들 집에서 돌아가며 하루씩 묵기도 한다. 그런데 정우네 반은 잘 드러나지 않는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반이었다. 힘이 센 영민이는 어른들이 보지 않는 데서만 친구들을 괴롭혔다. 특히 정우가 그 대상이었다. 그걸 관찰한 희망이가 영민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거울치료를 해주는 장면은 통쾌하긴 했지만 어딘가 씁쓸함도 남았다. 희망이가 정우네 집에 묵게 된 날, 희망이는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이 감정사전을 만드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정우의 상태가 ‘외로움’이라는 것도 알려준다. 정우는 희망이와 한 침대에 누워 따뜻함을 느낀다. 물리적 온도와 상관없이 말이다. 오죽하면 그렇게 느낄까 라는 생각도, 희망이 모니터에 뜬 ‘우정’이라는 감정도 슬프고 부질없게 느껴진다. 그게 우정이면 뭐가 달라져? 정우는 희망이에게서 희망을 보았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지만 난 더욱 큰 슬픔을 본 느낌이었다.
[내 남친은 내가 지킬 거야]에 나오는 로봇은 위의 희망이와는 완전 딴판이다. ‘리오’라고 하는 이 로봇은 점점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건 범준이가 ‘하리’라는 여친을 사귀면서부터였다. 즉, 리오는 질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질투가 왜그리 섬뜩한지, 섬뜩하면서도 어디서 많이 본 심리와 행동이다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리오의 뇌 원본은 불법으로 내려받은 것이었고 원본 주인은 사고로 죽은 여학생이었다. 시기와 암투, 이간질에 젖어있던. 질투심과 분노에 가득찬.
그 감정이 축적되고 확대되어가는 리오는 잘못하면 살상무기나 다름없었다. 다행히도 범준과 하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리오의 작동을 멈출 수 있었지만.... (이 부분이 그동안의 곤란함에 비해 좀 싱겁게 느껴지긴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
“미안하지만 리오, 우리 인간을 지키는 건 우리가 할게.”
이건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로봇이 감정의 영역까지 대신하는 건 난 솔직히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지만 가능하다고 해도 거기까지 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이 섬뜩하고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로 나와 같은 생각을 말하는 것일까.
세 번째 작품 [또나의 응원]에는 로봇이 나오지 않지만 SF적 상상으로 자주 등장하는 ‘평행우주’가 잠시 교차하여 또다른 나의 존재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시공간이라는 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그러니 아주 멀리, 동시에 아주 가까이에 다른 존재가 살아갈 수 있다는 상상은 충분히 가능하다. 둘은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헤어졌는데.... 이 작품에 작가님이 어린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들어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마지막 [도망가지 마]는 그냥 현실동화처럼 보인다. 선생님의 무관심과 간악한 무리들이 만들어낸 지옥 교실에서 시들어가는 선우의 이야기다. ‘뇌 인터페이스 가상 현실 프로그램’이라는 말에서 ‘아 여기 살짝 미래 기술에 대한 상상이 들어갔구나’ 생각될 뿐이다. 어쨌든 지옥같은 현실에 돌아오고 싶지 않아 의식이 깨어나길 거부했던 선우는 지금 돌아와 몸과 마음을 회복 중이다. 그리고 도망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SF의 느낌은 첫 작품이 가장 강하고 뒤로 갈수록 옅어진다. 대신 현실의 아이들이 겪는 복잡한 감정과 아픔은 더욱 진해진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작가의 말’에 이르면 첫 작품을 읽으며 뜨악하게 생각했던 내 마음과 작가님의 마음이 딱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게 된다.
그래서 학교를 비롯한 어린이의 세계는 자기 손으로 쓰고 만들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읽고, 직접 부딪치며 겪어내고 느끼고 생각하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AI 교육을 저학년때부터 어쩌구 하며 허울 좋은 말만 하시는 분들은 자기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지 좀 돌아봤으면 한다. 이런 책도 좀 읽어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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