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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트리스의 서재
  • 고구레 사진관 - 하
  • 미야베 미유키
  • 11,250원 (10%620)
  • 2018-09-19
  • : 110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다...

여름 햇살처럼 길고 무더웠던 소년의 성장담





소년은 힘겹고 더디게 청춘의 여름을 통과하다가

문득 어른이 된다.

문득...



돌아보면 바로 한 걸음 뒤에 서 있는 낯익은 소년을 발견하고 문득

자신은 더 이상 그 소년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문득

돌아보면 마지막 한 걸음을 떼기 위해 힘겨워하는 소년이 보이고 문득

그 때 그 한 걸음을 떼기가 왜그리 힘겨웠는지 의아해한다. 문득

사실은 무척 그리워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문득

그렇게 자신은 어른이 되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신작 '고구레 사진관'은 소년이 어른이 되기(혹은 한 뼘 성장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 성장소설이다.

유난히 소년의 성장담에 강한 면모를 보여온 미미여사의 장기가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온다 리쿠가 소녀의 심리를 꽉 잡고 있다면 미미여사는 소년의 심리와 성장 드라마에서 발군의 필력을 과시해왔다. 이번 작품에서도 미미여사는 상처를 꿋꿋하게 극복해가는 소년과 소년 주변의 이야기를 훌륭한 터치로 드로잉해 간다.

고구레 사진관이라는 낡고 미스터리한 공간적 배경이 소설 전반에 배치되지만 소년의 이야기는 제목에서 일면 연상될 수 있는 으스스함이나 미스터리적인 요소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우리는 차라리 이 고풍스런 제목에서 '추억'과 '드라마'를 떠올려야만 한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의 사진 한 장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지만 사진 속 인물들을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어렴풋이 존재하던 미스터리나 공포는 금방 그 베일을 벗고 곧장 현실성 짙은 드라마가 얼굴을 내민다. 무시무시한 살인마나 악귀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드라마 속에는 다만 인간이 있고, 인간의 사연이 있고, 인간의 사연 속에 스민 상처와 눈물, 그리고 따뜻한 웃음이 있을 뿐이다. 한 장의 사진 속에 인간의 모습이 한순간 담길 수 있지만 그의 유구한 인생과 인생 속에 담긴 역사, 시간의 무게까지 담기기에는 무리가 있다. 설혹 담겨져 있다한들 그것을 알아차리긴 힘들다. 그래서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밖에, 들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등학생 에이이치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을 찾아가고,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고, 듣고, 우리에게 전달해준다.



이 책은 네 편의 중편이 담긴 연작 소설집 같은 면모를 띠고 있지만 사실 각 작품들의 독립적 구성 방식이나 등장인물의 수, 서사의 분량 등을 따져봤을 때 중편이 아닌 장편으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두 권의 원고를 모두 합하면 족히 4000매는 넘을 것 같다. 각각의 제목으로 (시리즈 형식의)독립된 네 권의 장편소설로 출간되어도 무방할 정도다. 역대 미미여사의 작품 가운데서도 '모방범', '브레이브 스토리'에 필적할 만큼 두꺼운 분량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두 권을 다 읽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초반에 배치된 두 편의 작품이 후반에 배치된 두 편의 작품보다 상대적으로 지루했다는 것도 책 읽는 시간이 길어지는데 한 몫을 했다. 이 작품이 차라리 중단편 연작이었다면 그런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했듯 이것은 장편 연작이다. 분량이 엄청난 두 편의 장편을 읽을 때까지 사실 나는 이 '고구레 사진관'이라는 작품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일단 앞선 두 작품은 내용도 구성도 서사를 풀어가는 방식까지도 너무 흡사했고, 그닥 큰 감동을 줄 만한 드라마도 아니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애정도 쉬이 깊어지지 않았다. 긴 장편을 그것도 두 편씩이나 읽을 때까지 '고구레 사진관'이라는 작품의 진정한 매력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앞선 두 이야기에는 그나마 심령 사진, 혹은 유령 사진을 방불케할만한 수수께끼의 사진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흡인력은 하권의 두 이야기에 비해 다소 떨어졌다.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하권부터 시작되는데, 이미 죽었음에도 가끔 유령으로 출몰한다는 소문이 떠도는 고구레 사진관의 전 주인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갈매기의 이름'에서부터 비로소 모든 등장인물들이 확실하게 자기 색깔을 찾고 독자는 '고구레 사진관' 특유의 이야기 방식에 비로소 편안하게 적응해 간다. 인물들의 개성이나 장점들도 부각되기 시작하고, 서사의 매력만 따져봐도 세번째, 네번째 이야기가 훨씬 좋았다. 감동의 깊이나 울림도 후반부로 갈수록 커진다. 가장 좋았던 에피소드가 '갈매기의 이름', 다음은 네번째 수록작 '철로의 봄'이었다.(그 다음은 첫번째, 두번째 순)



이것은 또한 상처에 대한 이야기다.

네 편의 에피소드에는 아무에게도 꺼내놓지 못한, 가슴 속 깊은 곳에 꽁꽁 묻어둬야만 했던, 아프고 쓸쓸한 자기만의 상처를 간직한 이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에이이치부터가 그런 존재다. 소년은 어려서 귀엽고 사랑스런 여동생을 잃는데,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책하며 살아왔다. 그런 소년에게 우연처럼 날아드는 낡은 사진 속의 인물들에게도 모두 각자의 사연과 상처가 숨겨져 있다. 사진 속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동행인들에게도 각자의 상처가 있음을 알게 된다. 소년은 그렇게 자신의 상처와 타인의 상처를 함께 어루만지며 조금씩, 성장해 간다.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면서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을 직시하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를 키워가고

타인을 직시하면서 자신에 대한 배려를 키워가고

자신에게서 타인으로 내 안에서 세상 밖으로

눈 돌릴 줄 알게 되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사람과 세상을 필름 속에 담아내듯,

보다 따뜻하고 현명한 시선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청춘의 시간은 완만한 나선계단과도 같아서 한참을 올라갔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돌아보면 겨우 한 층을 올라섰을 뿐이라고 온다 리쿠가 이런 얘기를 했던가... 길고 길었던 고교 시절을 끝내며 에이이치는 그렇게 문득 돌아본다.

수많은 방황과 갈등과 문제들을 가득 안고 스스로의 하중을 견뎌내지 못해 바둥거리는

빛 바랜 사진 속 어리고 무르고 그리운 그 모습을

완만한 나선 계단 같았던 자신의 소년 시절을...

힘겹게 오르고 오르고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한 층을 올라섰을 뿐인

그러나 그 한 층을 자신의 두 발로 기어이 올라섬으로써 한 뼘 성장할 수 있었고,

소년을 지나 어른으로 올라설 수 있었음을 깨달으며,

비로소 낡은 사진첩 속에 오롯이 담긴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담담히 추억할 수 있게 된다.

소년은 그렇게 문득

어른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지난 상처를 담담히 직시할 수 있을 때...

바로 한 걸음 뒤에 애틋하게 표구된 빛 바랜 사진처럼 동그마니 앉아 있는 낯익은 지난 시간을 담담히 껴안을 수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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