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아.. 단편이면 더욱 좋았을 것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산업스파이 꽃뱀에게 걸려, 잘나가던 컨설던트 도랑은 한 순간에 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도랑은 개 산책시키는 아르바이트도 개들의 사고로 쫓겨나고, 고시원에서는 성추행범의 누명을 쓰고 쫓겨나고, 찜질방비 6000원을 아끼기 위해서 노숙하다가 불량 고딩들에게 그 돈마저 빼앗기고, 결국 한식당의 불판닦는 일로 생계를 전전한다. 정말 처절할 때까지 추락한 인생의 밑바닥에서 위로가 되어 주는 사람은 정체가 불분명한 용역업체 사장 삼손과 홀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녀가장 미향 뿐이다.
이렇게 살아가던 도랑에게 돈 많은 은행나무집 짱아오 종 순종 개 라마를 산책시키는 업무가 맡겨진다. 라마 트레이너라는 직함으로 대기업 근로자보다 더 많은 돈과 좋은 대우를 받아가며 도랑은 다시 인생 역전의 기회를 살핀다. 점점 과거처럼 오만해지려는 도랑 앞에 인생은 한번 더 쓴 맛을 보여준다. 갑작스런 라마의 도망과 죽음..... 이렇게 다시 마주친 바닥이지만, 도랑은 전과 달리 삼손, 미향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이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도랑이 생의 밑바닥을 전전하는 첫 번째 부분, 라마를 맡으면서 희망과 신분 상승의 꿈을 키우는 두 번째 부분, 인도로 간 형의 죽음, 사랑을 얻기 위해 거짓 인생을 살던 은주의 자살, 라마의 도망, 몽몽 원장의 트라우마를 거치면서 좀 더 성숙해진 도랑의 모습을 묘사하는 세 번째 부분이다.
그 중 작가의 기발함과 문장의 탄탄함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곳은 첫 번째 부분이다. 도랑의 꼬인 삶, 브레이크 없이 추락해가는 생활의 처참함이 ‘노숙’과 ‘노동’을 거듭하는 도랑의 의식 흐름을 따라 기가 막히게 펼쳐진다. 잘 짜여진 플롯의 탱탱함에 취할 무렵(두 번째 부분 뒤 쪽부터), 갑자기 문장의 탄력은 현저하게 힘을 잃어가고 부연 설명이 많아진다. 책을 내려놓는 순간, 내가 생각한 한 마디.. ‘아∼ 단편이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을^^’
그래도 1965년 생 전민식 작가의 늦깎이 첫 작품인 이 책은 다음 작품이 충분히 기다려질 만큼 기발하고 매력적이다.
2. 내 불행한 현재는 과거에서 기인한 것?
“위선이나 거짓은 세상이라는 기계를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 같은 거야. 그리고 거짓이나 위선이 없으면 진실이나 선은 아무 의미가 없어. 알겠지만 사람들은 말이지, 행복한 소식 즐거운 기사는 잘 안 봐. p.46”
“과거는 과거일 뿐일까? 과거의 행동과 물리력은 특별한 왜곡이 없는 한 결국 현재에 이르고 미래에 다다른다. 내가 손에 쥔 책에는 그렇게 쓰여져 있었다. 나의 현재가 운명이라는 말을 믿기에는 억울했다. 하지만 과거의 물리력이 현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말은 수긍이 갔다. p80”
성공의 사다리를 타고 있던 도랑에게 세상은 살아볼만 한 곳, 자신이 노력하면 어떻게든 답을 주는 곳이었다. 하지만 바닥으로 떨어진 도랑에게 세상은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된 세상으로 다가온다. 인생의 격언을 외우고, 영어 학습기를 반복해서 들어도 열심히 불판을 성실하게 닦아도 답을 찾을 수 없는 곳.. 그 곳에서 도랑은 자연스레 자신의 과오를 떠올린다. ‘성공 지향’에 잊혀졌던 비도덕적 행동들.. 영화관 앞에서 깡패들에게 시달리던 고등학교 친구를 외면했던 일, 친구의 자취방에서 돈을 훔친 일, 자기를 때린 친구에게 수면제를 먹인 일, 전철 역에서 취객의 지갑을 슬쩍한 일 등.. 그리고 뒤늦은 죄책감을 느낀다. 자신의 불행한 지금.. 바로 현재가 내가 잊고 있었던 과거에 자기가 잘못했던 것에서 어쩌면 기인했을 수도 있다고 도랑은 생각한다. 과거를 반추하고 진실한 자신과 직면할 수 있는 기회는 어쩌면 실패가 주는 미덕일지도 모른다.
3.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
3-1. 도랑은 숨겨진 능력이 있다. 개들은 도랑을 본능적으로 좋아한다. ‘인간의 표정을 읽을 줄 아는’ 똑똑하고 충직한 라마도 도랑을 따르고 좋아한다. 도랑은 라마로 인해 잠시나마 인생 역전의 기회를 맞는다. 하지만 개들이 좋아하는 도랑의 체취... 그것은 개도살자였던 어머니의 흔적이었다.
“ 하나는 인정할께요. 당신에게서는 개들의 냄새가 나요. 딱히 그 냄새를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래요. 라마가 반응한 것도 아마 그 냄새 때문인 거 같아요.” 집사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 문득 떠오른 얼굴이 어머니였다. 개백정이던 어머니, 집 뒤뜰에 늘 개들이 들끓고 개장국 냄새가 가시지 않았던 집 안 풍경과 냄새도 기억났다. p.149"
폭력적인 아버지를 미워하던 아들은 자신도 모르게 폭력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나에게 본능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지난 삶의 흔적은 언제 어느 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올지 모른다. 도랑이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었던 개백정 어머니.. 키워지고 잡아먹히는 그 상관 관계가 싫어서 도랑의 둘째 형은 어머니 모르게 개들을 풀어주고, 어머니가 개를 잡던 몽둥이로 밤새 매타작을 당했다. 그 후 절반의 개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개들을 어머니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돌아온 개들은 하나하나 어머니의 몽둥이에 죽어갔다. 가족같던 개들의 죽음 위에 자라온 도랑이 개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라^^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3-2. 모든 끈을 잃고 고립화된 도랑은 역할대행 업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 곳 사장 삼손을 만나게 된다. 삼손은 이혼한 부인과 자식을 유학보냈다고 하는데, 싸움도 잘 하고 학식과 깊이까지 있어서 맡겨진 역할 대행을 철저하게 해내는 신비한 사람이다. 그는 알게 모르게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었고 도랑에게도 인간적으로 대해준다. 굉장히 합리적이면서 따뜻한 사나이, 하지만 삼손의 부인과 자식은 유학가서 잘 지내는 게 아니라 새 남편에게 살해당했다. 삼손은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도랑을 그 곳에 소개한다.
“ 여기 있는 사람들은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경험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들이 결코 소멸한 게 아니라 다른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는 거예요. 물론 멍청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어요. p. 231”
죽은 사람들을 잊지 못해 그리워해서 똘똘 뭉친 사람들의 모임, 차원의 문을 넘어서면 죽은 그들을 볼 수도 있으리라는 엉뚱한 희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모임. 그래서 이 사람들은 경찰에게 해제해야할 자살클럽이라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운을 내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겪어본 사람들, 그리고 자신도 자살을 생각해본 사람들.. 그들이 자살을 예방한다는 것~~ 또 다른 아이러니이다.
결국 생의 밑바닥에서 부대끼며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돕고, 스스로를 치유해간다. 치유는 삶의 조건을 개선한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자작극을 연출했던 은주가 자살했던 것처럼. 라마의 죽음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도랑의 동앗줄이 끊어지는 것처럼. 사회적 책임에서 도주했던 작은 형이 시신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4. 같이 이야기 해 봐요.
1. 정말 현재의 불행은 과거에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일까?
2. 자기가 부인하고 싶었던 특성이나 콤플렉스가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었던 경험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보자.
3. 사회 밑바닥에서 절망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시스템은 어떤 방식으로 가야할까? (치유는 삶의 조건을 개선한다 해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면..)